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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어부의 낮잠

김원철 바오로(보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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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 배를 포구에 대놓고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도시에서 온 관광객이 풍경 사진을 찍다 의도치 않게 어부의 단잠을 깨웠다. 그가 어부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날씨도 좋고, 바다에 고기도 많은데 왜 바다에 나가지 않고 이러고 있어요?” “아침 일찍 다녀왔소.” “하루에 두 번, 세 번 나가면 돈을 몇 배로 벌 텐데요. 그럼 큰 배를 사고, 냉동창고를 지어 생선 가공 공장도 열 수 있고. 누가 압니까? 대형 선단을 이끄는 억만장자 사업가가 될지.”

어부는 그가 뭘 말하려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러고 나면?”하고 물었다. “그럼 아름다운 바닷가 햇살 아래서 날마다 달콤한 낮잠을 즐기고, 마음껏 놀고먹고. 그림 같은 경치도 감상하면서.”

어부는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당신이 와서 잠을 깨우기 전까지 내가 그러고 있었잖소!”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이 들려준 우화다.

요즘 회사 근처 맥줏집 사장님의 안색이 말이 아니다. 직장인들이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한창 몰려올 시간인데도 홀이 휑하다. ‘빈 차’ 등을 켜고 손님을 찾아 배회하는 택시 기사들 심정도 타들어 가기는 매한가지다. 이 우화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선물하고 싶어 고른 나름의 ‘위로 비타민’이다. 이딴 얘기가 무슨 위로가 되느냐고 시큰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허나 글쟁이에게 뭔 재주가 있겠는가. 이런 환난에는 어쭙잖은 필설로 심각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도 죄짓는 일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럴 때는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주과학자들은 달을 보면서 행성거리와 지표면을 연구하겠지만 모두 그럴 필요는 없다.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 찧는 토끼를 찾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살이가 덜 팍팍하다.

우울하고 불안한 뉴스만 쏟아지는 게 아니다. 답답한 마음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사람들 얘기도 많다. 한 시민은 직접 만든 마카롱을 질병관리본부에 보내 직원들 피로를 한 방에 날려보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할머니가 얼기설기 바느질해서 동사무소에 갖다 준 누런 면마스크 20개는 우리의 코끝을 찡하게 했다. 할머니표 면마스크야말로 KF94 방역용 마스크보다 효능이 100배 뛰어난 ‘희망 백신’이다. 이런 천사들이 많이 사는 곳이 천국이다.

비록 돌발적 변수로 인해 잠시 멈췄지만, 이참에 사색에 잠겨보는 것도 좋다. 지금 이 멈춤은 무엇에 쫓기듯 정신없이 달리다가 갑자기 ‘잠깐만’ 하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시간이 돼야 한다.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 인간의 탐욕과 바이러스의 역습…. 이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없으면 바이러스 재앙은 언제든 또 닥친다. 우리가 위기를 넘긴 뒤에도 예전과 똑같이 살면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게 하나도 없는 꼴이 된다.

시민들이 웬만한 모임은 취소하고, 쇼핑 외출도 자제하고 있다. 두어 달 전만 해도 약속은 꽉 잡혀 있었고, 사야 할 것도 많았고, 먹어야 할 것도 많았는데 지금은 영 딴판이다. 갑자기 축소된 일상이 낯설다. 하지만 곰곰 따져 보면 이 같은 단출한 일상이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아닌가. 줄일 것 줄이고, 뺄 것 빼고, 건너뛸 것 건너뛰고 사는 게 미니멀 라이프다. 줄이고 빼고 단순화해야 삶이 흔들리지 않는다.

움츠러든 사이 봄이 성큼 곁으로 다가왔다. 따스한 봄볕을 이불 삼아 낮잠 한 잠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한결 좋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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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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