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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절뚝거리며 언덕길 올라가기

석영중 엘리사벳(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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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창궐 이후 두려움과 삶에의 의지를 동시에 경험하며 살고 있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은 두려움을 촉발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만끽하고자 하는 본능은 삶에의 의지를 부채질한다.

본능은 선악을 초월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명제 역시 선악을 초월한다. 제2차 대유행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겨냥한 복원과 회복 전략이 언급되는 것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최근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었다. 1812년 대(對) 나폴레옹의 ‘조국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장대한 스케일의 대하소설로, 주인공 피에르가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살아남아 내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서사의 핵심으로 한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세계적으로 52만 명이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질병과 상실과 실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적’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이란 말이 새삼 와 닿는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에서 살아남는 주인공의 서사는 소설의 경계를 뚫고 나와 지금의 현실에 슬그머니 중첩된다.

피에르는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혀 막사에 수용된다. 그곳에서 그는 같은 포로인 일자무식 농부 카라타예프의 보살핌을 받으며 소생한다. 현명하고 순박한 농부에게서 피에르는 삶의 모든 것을 수용하고 견뎌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카라타예프는 그의 은인이자 스승인 셈이다.

그런데 그가 카라타예프와 작별하는 방식은 매우 불편하게 그려진다. 퇴각하는 프랑스군은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병들고 나약한 러시아 포로들을 바로 사살한다. 늙고 쇠약하여 행군 대열에서 낙오하기 일쑤인 카라타예프가 사살될 것이라는 점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하다. 죽음을 앞둔 카라타예프는 피에르에게 눈빛으로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지만, 피에르는 그의 시선을 짐짓 못 본 체한다. 얼마 후 뒤편에서 총성이 울린다. “피에르는 그 후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언덕길을 올라갔다.”

천재 소설가의 역량이 눈부시다. 그는 단 두 문장으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실존의 밑바닥을 파헤친다. 피에르의 상황은 낯설지 않다. 어디 전장(戰場)뿐인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약한 사람, 병든 사람, 낙오하는 사람은 죽고 건강하고 악착같고 운 좋은 사람은 산다. 이웃이 사업을 접고, 친구가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가족이 병고에 시달리며 서서히 죽어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간다. 때로는 뒤처진 사람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하기도 한다. 본능이 생존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는 못할지언정 소풍이라도 가듯 가볍게 걸어갈 수는 없다. 평생 동안 절뚝거리면서 인생의 언덕길을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절뚝거리는 것만이 살아남은 우리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차려야 하는 예의인지도 모른다.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강하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신이 증오스럽다고 썼다. 그러나 스스로를 증오하며 사는 것 보다는 절뚝거리며 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절뚝거림은 수천 가지 다른 방식으로 실현된다. 조금 덜 누리고, 조금 덜 즐기고, 조금 더 양보하고, 조금 더 봉사하고, 조금 더 감사하는 것도 절뚝거림의 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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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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