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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의 어른은 진보다] 관용이 복음이다

김경집 바오로(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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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776년 3월 10일 경희궁 숭정전에서 조선의 제22대 국왕에 등극한 정조의 첫 일성이다. 그 순간 조정은 얼어붙었고 대신들은 몸을 떨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무관한 신하는 없었다. 아버지를 잃고 가까스로 세손이 되었으나 끊임없는 감시와 모함 속에서 숨죽이며 살았던 새 임금이었다. 역적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다며 선두에 섰던 이가 다른 이도 아닌 친고모(화완옹주)와 외종조부(홍인한)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매일이 죽음과 맞닿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새 국왕의 일성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 것이었으니.

그러나 정조는 정적들을 죽이지 않았다. 오직 군권을 장악하며 사사건건 맞섰을 뿐 아니라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갈 때 모욕하고 왕비와 왕자를 독살하고 정조까지 암살하려 했던 구선복을 능지처참했을 뿐 모두 유배형에 그쳤다. 대신들이 사사(賜死)하라고 청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고모 화완옹주도 나중에 한양으로 돌아와 궁에 들어와 살게 했다. 물론 고도의 정치술이고 당시 어쩔 수 없는 타협이기도 했겠지만, 대의를 위해 작은 원한은 눌렀다. 정조의 여러 업적(물론 정체 반정의 독선적인 부정적 측면도 있지만)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끌리는 부분이다.

영ㆍ정조 때 탕평책이 나온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가 결딴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조정의 대신이라는 자들은 국가의 안위와 번영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붕당과 가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렇다고 강력한 왕권으로 그걸 누르지도 못했다. 사실 당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선조가 당쟁을 이용한 것은 적손(嫡孫)이 아니라 방계 혈통의 계승자였기 때문에 조정에 자신의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고도의 정치력,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주가 신하보다 더 높은 수준의 학문과 사고를 갖춰야 했다. 그래야 왕의 권위가 서고 정권의 교체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붕당을 지어 서로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서는 무조건 상대 당파를 억누르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른바 사화나 환국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그리고 건전하게 유지되는 당쟁은 평화로운 정권교체였으며 조정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했다. (그 긴장이 끊어지면-일당독재나 세도정치에 의해-더는 공부는 없고 탐욕만 난무했다)

정조는 끊임없이 공부했고 학문으로도 신하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탕평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군주의 부단한 학문의 연마와 냉정한 판단력 그리고 거대담론의 의제를 제시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단호한 추진력에서 나온다. 그러나 거기에 필수적인 건 바로 관용이다. 당파가 다르면 혼사는커녕 같은 동네에서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을 정도로 척지고 살며 무조건 상대를 쓰러뜨리기에만 골몰했다. 그러니 정조의 등극 제1성이 얼마나 큰 충격이고 공포였겠는가. 그러나 정조는 복수하지 않고 최대한 포용했다. 불행히도 정조의 죽음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로 악화하였고 파멸로 빠져들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서로 물고 뜯기 바쁘다. 구실만 잡으면 상대를 쓰러뜨릴 생각만 한다. 자신들은 더 심한 비리와 무능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만 그런 게 아니다. 인간관계까지 그렇게 오염된다. 심지어 종교까지 그 판에 끼어들어 오염을 가중시킨다. 이럴 때일수록 관용의 힘을 회복해야 한다. 복음의 요체도 너그러움이고 불법(佛法)의 핵심도 자비다. 기도만 열심히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너그러움과 자비로움은 실천할 때 비로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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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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