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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의 창] 한국인의 행복관 / 최현민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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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행복에 대한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삶의 여유가 더 생기면서 행복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일까?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라 논하기가 쉽지 않다. 이렇듯 개인의 행복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데 국가별로 행복을 비교한다는 건 어불성설인 면도 있지만 OECD 주요국의 행복지수 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7위라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음이 드러났다.(2013년기준)

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졌지만 행복지수는 그에 못 미친다는 말이다. 왜일까?

한국인의 낮은 행복감은 우리의 욕구 변인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연구가 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의 정신세계는 혈연중심의 친족주의와 현세적 복락을 추구하는 현세 기복주의와 배상주의가 상호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면이나 배상주의는 좀 새로운 개념인 듯 싶다. 이는 현대와 같이 과열경쟁 사회에서 자신이 체험한 삶의 고난에 대해 대가를 되돌려 받기를 갈망하는 심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된 혈연 지연 학연의 관계주의나 현세기복주의 배상주의가 한국인이 지닌 지복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한국인의 지복의식이 지극히 세속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명절인사에서의 ‘복’이 의미하는 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 염원하는 복은 재산이나 명예 권력과 같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행운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게 김 교수의 해석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속적 행복의 가치는 한국사회와 같이 과열된 경쟁사회 악성 서열주의 문화 속에서는 점점 더 채워지기 어렵다. 그러기에 한국인의 행복감이 낮다고 드러난 게 아닐까?

우리 역시 그리스도교인이기 전에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한국인이 지니는 기복적 행복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행복관이 기복적 차원에만 머무른다면 자칫 우리는 삶에 드리운 고통이나 어려움의 의미를 놓치기가 쉽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고통을 ‘신비’라 표현한다. 그만큼 고통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고 의미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리라.

사실 불행이나 고통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과 불행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삶에 드리운 어려움과 고통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 그 것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이지 싶다.

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것을 우린 이미 삶을 통해 알고 있다.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음을….

이렇듯 행복과 불행이 씨줄 날줄로 엮어져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기에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던가. 좋은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그 어떤 상황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로 새해를 열고 싶다.

코헬렛이 말하듯 우리에게 다가올 그 모든 다양한 ‘때’를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일 마음으로 이 한해를 시작하고 싶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어진 것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숨어 있다고 믿으며 그 순간들에 충실한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보며 2015년 을미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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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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