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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화해 일치] 남북간 교류협력 언제쯤…/성기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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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3일 독일 정부가 통일을 선포한 후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독일 통일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독일은 물론 한국에서도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독일 통일이 최근 들어 유독 관심을 끄는 이유는 통일 이후 사반세기가 지났다는 역사성뿐만 아니라 최근 우리 주변에서 목격되는 통일 열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8·25 합의를 통해 정부 및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교류협력을 재개하기로 합의한 직후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조속한 평화통일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7~8년간 개성공단을 제외하고는 남북간 교류협력 사업이 전면 중단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제 막 교류협력의 통로를 다시 트기로 합의하자마자 ‘조속한’ 통일 담론이 등장한 것은 패러독스 중의 패러독스였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경험은 장기간에 걸친 교류협력을 통해 징검다리를 놓지 않고서는 통일을 논의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독일 통일은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방면의 지속적 교류를 통해 서독의 현실을 접하게 된 동독 주민들이 1990년 3월의 인민의회 선거에서 조속한 통일 공약을 내걸었던 독일연맹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됐기 때문이다.

동독 주민들이 스스로 서독에 편입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통일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독일 통일은 흡수통일이라기 보다는 ‘가입형 통일’이라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동독 주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서독행을 선택하게 한 동기는 무엇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1969년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집권 이후 추진해왔던 ‘접촉을 통한 변화’ (Wandel durch Annährung) 정책이다. 브란트의 집권 이후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이어졌다. 서독의 언론사 특파원이 동독에 상주할 수 있게 된 것은 1973년부터였다. 연간 2억 통의 편지가 동서독을 오가며 서로가 살아가는 모습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76년 체결된 우편통신 협정 덕분이었다. 이러한 동서간 정보 교류의 비약적 증가는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선거를 통해 체제선택의 기회를 갖게 된 동독 주민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준거집단이자 이상향이었던 서독을 선택하게 된 동력이 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유럽 사회주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의 문을 열어젖힌 기민당 소속 헬무트 콜 총리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콜 총리는 동독 기민당과의 연대에 기반한 독일연맹을 통해 동서독 화폐의 1대1 통합 공약을 제시함으로써 1990년 선거에서 동독 주민들의 선택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말하자면 독일 통일의 긴 여정에서 튼튼한 철로를 깐 것은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였고 이 철로 위로 통일열차를 달리게 한 것은 기민당의 콜 총리였다. 분명한 것은 철로를 깔지 않고는 기차가 달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남북간 교류협력 철로는 언제나 복원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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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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