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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화해 일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통일강연 / 성기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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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대륙의 북서쪽 끝에서 핀란드를 마주보고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가리켜 시인 푸쉬킨은 ‘유럽을 향해 열린 창’이라고 불렀다. 모스크바에서도 600km나 떨어져 있어 한국에서는 비행기로만 10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 낯선 도시의 대학생들이 지난 주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내의 한 호텔에 모여들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현지 한국 총영사관이 주최한 통일강연에 연사로 참석했던 필자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러시아 학생들의 관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산가족 문제와 사회문화 교류 등 남북관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뜨거웠고 질문도 다양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들 젊은 세대들이 한국에 대해 예상외로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마다 만났던 60~70대 한반도 전문가들의 친북편향적 태도에 지칠대로 지쳤던 경험을 가졌던 필자로서는 러시아 내 한국학 3세대를 대표할 이들의 시선이 더욱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국 중의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눈앞에 둔 1945년 2월 열렸던 얄타회담에서 구소련의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대일본 전쟁 참전에 합의한 바 있다. 소련의 대일본 참전은 러일전쟁 이전 극동지역에서 누렸던 영향력의 회복과 동시에 일본이 떠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의미했다. 한반도의 분할 점령에 관한 한 소련은 미국보다 한 발 빨랐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련의 대일본 참전을 전후한 상황의 전개였다. 당초 얄타회담 합의의 조건은 독일과의 전쟁 종료 이후 3개월 내에 참전한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것은 5월 9일이었고 태평양전쟁에 참여한 것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진 직후인 8월 9일이었다. 표면적으로는 3개월 내 참전의 약속을 지킨 것으로 보이지만 소련으로서는 원폭 투하 이후 항복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일본을 향해 서둘러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한반도의 전후 체제 형성 과정에서 너무나도 손쉽게 기득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놓고 러시아의 원로 학자들이 ‘소련은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피흘린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내 1세대 한반도 전문가들이 갖는 오만함에 가까운 자부심의 배경에 이런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도 지울 수 없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미래세대 한반도 전문가들과의 만남이 즐거웠던 이유는 바로 이런 기억들 때문이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은 과거로부터 강요받을 수 없고 세대를 거치면서 재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것 또한 예기치 못한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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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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