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사람과사회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방주의 창] 자비의 스캔들 / 이연학 신부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자비의 희년에 맞이하는 사순시기가 깊어간다. 사순시기의 큰 주제는 물론 ‘회개’이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교적 회개는 하느님 자비의 빛으로만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다. “당신의 사랑 앞에 나는 옷을 벗었다 거짓의 옷을 벗어버렸다”고 노래한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우리가 죄인임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조건없는 용서와 자비 앞에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비야말로 사순시기의 주제라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그러니까 이 사순시기 우리는 정녕 ‘자비의 계절’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통틀어 자비만큼 알아듣기 힘든 것도 또 없었다. 사실 예수님이 단죄받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도 필경 그분이 보여주고 선포하신 하느님의 자비가 당대 종교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눈에는 ‘너무 나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지나친 자비’가 죄인과 의인을 구분짓는 안정적인 경계선을 너무도 수월하게 무너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말해보자. 그분은 비틀거리며 갈지자로 인생길을 걸어가는 죄인들에게 근엄한 얼굴로 “똑바로!”라고 잔소리하신 적이 없었다. 그랬더라면 그분 역시 당대 쌔고 쌨던 ‘꼰대’(율사와 바리사이)들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그분은 지극한 측은지심으로 곧바로 그들에게 다가가 주셨다. 그리고 허리를 부축하며 어깨를 겯고 동행해주셨다. 그리하여 세리나 창녀같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나아가 그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먹보요 술꾼”이란 오명을 달게 받으셨다(마태 11 19 참조).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윤리와 영성의 선생으로 자처하는 이들에게 이미 크나큰 스캔들이었다. 마침내 그들 앞에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리에 들어간다”고(마태 21 31) ‘돌직구’를 날리기까지 하셨을 때 당신의 죽음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수순이 되었다. 하느님 ‘자비의 얼굴’인 예수님 메시지의 핵심은 이렇듯 당시 많은 신앙인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꼰대’들에게 걸림돌인 이 자비가 죄인들에게는 작열하는 해방의 한 소식이었다. 부자들에게 재앙인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가 가난한 이들에게는 참된 행복의 소식이었다(루카 6 20.24 참조). 그리하여 예나 지금이나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 ‘변두리 인생’들이야말로 하느님 자비의 복음을 가장 먼저 그리고 깊이 알아듣는다. 그들이야말로 “복음의 가장 뛰어난 수용자들”이다(베네딕도 16세). 반면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적 종교적 엘리트들에게는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기이한 현상이 생긴다(마르 4 12 참조).

자비를 알아듣는 것도 이처럼 예삿일이 아닐진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고(루카 6 36) 하신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일은 더 큰 스캔들을 초래한다. 지난해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재혼자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는 일이나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 등 민감하고 중요한 논점들에서 과거입장을 사실상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만 상황도 이 맥락에서 보면 그리 놀랍지 않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자비가 일으키는 스캔들은 2000년 전 예수님 시절처럼 현재진행형이다.

자비의 스캔들 그 ‘끝판왕’은 ‘원수사랑’의 계명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를 가장 그리스도교답게 만드는 ‘하느님의 햇볕정책’이지만 사실 오늘 가장 ‘잊혀진 계명’이 되어 있다.

점점 험악해져 가는 현재의 남북대치 정국에서 원수를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신 하느님 아들의 십자가 자비행에서 실천적 원칙과 해법을 찾자고 말하기 위해서는 돌 맞아 죽을 각오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 두려움과 증오와 분노의 자장(磁場)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6-02-28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0

시편 88장 3절
주님, 제 기도가 주님 앞까지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주님의 귀를 기울이소서.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