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사람과사회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방주의 창] 여우도 안다 / 박명기 신부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어린 시절 무슨 의미나 뜻인지도 모르면서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좋고 재미있었기에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 같다. 만화를 보면서 공상과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칠 수 있었고, 위인전을 보면서는 내겐 불가능할 것 같은 위대한(?) 삶에 대한 동경을 가지기도 했다. 고전과 근현대 문학을 읽으며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같은 풋풋함을 꿈꾸기도 했고, 80년대 중후반 조국의 현실을 아파하면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아가기도 했다. 목적 없는 책 읽기였기에 머릿속은 비빔밥처럼 섞여 있었고, 삶으로 연결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던 것 같다. 학창 시기에 책을 통해 소중하게 얻은 삶의 작은 이치가 있다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읽었던 책 중에서 기억에 깊이 새겨진 몇 권도 있었는데 그중에 한 권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세상은 돈만 있으면 살기 편해지고 있다. 현대의 과학과 문명은 인간의 삶을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기계문명의 눈부신 발전은 편리함이 극대화를 이룬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상의 편리함을 주는 과학의 발전은 현대의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을 했고, 고단한 일상에서 삶의 편안함을 누릴 수 있게 됐다. 빌딩은 구약의 바벨탑이 연상될 만큼 높고 견고하게 건축되고,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착각이 들 만큼 스마트폰의 진화는 놀랄 지경에 이르렀다. 우후죽순보다 많이 생긴 대학으로 인해 국민의 학력은 급상승했고, 국가의 경제지표가 되는 GNP(국민총생산)와 GDP(국내총생산)는 눈에 보이는 커다란 증가를 보였다. 그만큼 가계부채나 개인부채 또한 눈에 띄게 증가했음 또한 사실이다.

눈에 보일 만큼의 경제 발전과 눈부신 성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 및 실직자의 숫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눈에 보이는 발전을 위해 적용되는 기준은 이윤의 논리고, 돈이 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가치나 의미를 지녀도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윤의 적자생존이 매정하게 적용되는 사회가 되었다. 유물론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과학과 집단이기주의에 편승한 경제제국주의인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삶의 편안함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재화를 삶의 중심에 가져다 놓았다. 특히 우리 사회는 이윤의 극대화라는 경제 논리로 성장했고, 눈에 보이는 돈과 재화를 숭상하는 생활로 재편되었다. 편안함과 편리함은 기계에 종속되는 생활을 요구하고, 기계문명에 깊숙이 빠진 일상은 기계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인간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매료된 삶은 과학적이라는 미명 아래 보이지 않는 가치와 의미마저 수치로 전환시켜버리고 말았다. 행복과 만족도라는 것도 수치로 환산하여 계산하고 등급을 매기고, 사랑과 우정마저도 돈으로 치환시키는 경우도 있다. 돈과 재화만 가지고 있으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급기야 이 나라와 사회를 혼란과 농단과 불신과 탐욕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 10차에 걸친 청문회를 보면서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보기 좋은 것이 먹기도 좋다던 옛 말씀대로 좋아 보이는 것을 덥석덥석 받아먹은 이 시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내던지고 말았다. 생명, 존엄, 존중, 사랑, 신앙, 진리, 정의, 우정, 나눔, 정직, 순수 등등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켜야 할 삶의 소중한 가치들이 자리를 빼앗겼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자리를 눈에 보이는 재물이 차지한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중요한 가치는 우리 삶에서 밀려난 것이다. 진흙탕처럼 엉망이 된 오늘의 한국사회를 살아가면서 다시금 예전에 읽었던 「어린 왕자」를 떠올리며 곱씹어 본다.

어린 왕자와 여우가 헤어지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기억해 두려고 되풀이했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명기 신부(의정부교구 마두동본당 주임신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7-01-03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19

신명 31장 6절
너희는 힘과 용기를 내어라. 그들을 두려워해서도 겁내서도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시면서, 너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