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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내리사랑을 넘는 탈북 동생의 치사랑 /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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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잖아요.” 대학생 때 나간 교생실습에서 지도를 맡아주신 담임교사님이 내게 자주 들려줬던 말이다. 열정으로 가득 차서 실습을 나온 교생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상처받는 경우도 많이 봤다며 실습 첫날부터 이 말을 강조하셨다. 기대하지 않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는 이 작은 진리는 꽤 약발이 있었다. 실습 마지막 날, 내심 학생들도 나처럼 아쉬워할 거라 예상했는데 웬걸. 여느 날처럼 장난기 가득한 ‘중딩’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말을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내리사랑의 약발은 그로부터 몇 년 뒤 탈북자 멘토링 봉사활동을 하며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북한에서 온 동생과 일 대 일로 연결돼 ‘무기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모토를 가진 가톨릭 단체 활동이었다. 당시 막 한국에 입국했던 여동생을 소개받은 후 안부 전화와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러나 전화는 신호음만 듣다 끊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데이트 신청은 번번이 퇴짜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이렇게 몇 번의 구애 끝에 만난 동생은 놀라우리만큼 생글생글 붙임성 좋았다. 덕분에 지난날 짝사랑의 노고는 싹 잊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동기 활동가들이 대부분 같은 고민을 했다는 점이다. 동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하는 ‘내리사랑앓이’가 나눔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다가가야 멘토링 활동에 별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은 동생과 친해질 수 있을지 끝없이 얘기했다. 그로부터 5년여가 흐른 지금은 당시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무색할 정도로 동생과 편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바쁘면 바쁜 대로 서로 열심히 살다가 일단 만나면 그동안 쌓인 대화를 푸느라 시간은 금세 흐른다.

나아가 동생을 내리사랑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오히려 받는 게 많아진 관계가 됐다. 핸드폰에 저장해 놓은 ‘씩씩이’라는 별명처럼 당찬 동생을 보며 좋은 기운을 얻은 적도 많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를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치사랑을 보여준 것도 동생이다.

다른 멘토들의 멘티였던 탈북자 동생들도 내게 좋은 자극을 주는 주인공이다. 결혼, 출산이나 커리어 활동 면에서 ‘인생 선배’가 된 북한 출신 친구들도 나왔다. 특히 직업상 북한과 탈북자의 삶에 관해 궁금한 점이 생겼을 때 동생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경우도 생겼다.

만약 시간을 돌려 멘토링 활동을 처음 시작할 때의 나 스스로와 나눔을 할 수 있다면 ‘동생이 북한 출신이라는 점을 잊으라’고 말해주겠다. 돌아보면 동생과 인연이 쌓인 과정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괜히 동생이 북한에서 왔다는 점을 과잉 의식해서 스스로도 불편하고 조바심을 냈던 것 같다. 이 점이 오히려 동생마저 어렵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도 든다. 또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동생의 치사랑을 더 빨리 받았을 텐데, 아쉽기도 하다.


이정현(힐데가르다) 데일리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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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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