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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형제II / 손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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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 중에서 형제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흥부와 놀부’ 그리고 볏단을 서로에게 가져다주는 ‘의좋은 형제’가 생각난다. 두 이야기는 모두들 알다시피 대조적인 스토리 전개를 가지고 있다. 한 형은 욕심으로 아우를 괴롭히고, 다른 형은 아우가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몰래 도와준다. 흔히 두 부류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반영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결말, 권선징악적 구도에도 불구하고 둘 다 결국에는 감동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렇게 이분법적인 원리가 완벽히 적용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온전히 선만을 실천하거나 온전히 악만을 실현하는 인간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존경하는 위인이나 지도자, 손가락질을 받는 범죄자, 그 누구도 완벽하게 선하거나 악하지는 않다. 바라보는 사람과 그의 시각이 어느 면을 조명하느냐에 따라 선을 부각시킬 수도 악을 부각시킬 수도 있다.

다툼과 싸움이 있는 이면에는 각각의 시각과 입장이 있고, 그들이 자라 온 환경과 살아낸 배경이 다르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그렇다면 갈등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가 화해의 관건이다. 지속적으로 나의 시각만을 주장할 것인가, 그의 시각을 들여다 볼 것인가에 따라 결말은 완전하게 달라진다.

두 형제가 다툼을 하고는 각각 자신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세상은 돌아간다. 주방에서 엄마는 저녁을 짓고, 이웃에서는 맛난 반찬을 나누어 먹자 할 수도 있다. 방문을 열고 나와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화해를 청해도 문을 계속 잠그고 분노를 풀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즐거운 저녁시간을 잃어버려 손해를 보는 것은 두 형제뿐이다.

형이건 아우건 그 누구든 미리 마음을 풀어 문을 열고 나와 상대의 방문을 두드린다면, 주위의 그 누가 와서 달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불러일으켜 더욱 쉽게 닫힌 방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 두드리는 방식이 여전히 화로 가득차서 ‘네가 먼저 나를 때렸잖아, 나에게 욕을 했잖아’라고 말하는 자기방어와 보복이라면 싸움이 더 크게 번질 것은 뻔하다. 지속적으로 부드러운 언어와 진정성 있는 손길로 두드릴 때에야 비로소 닫힌 문뿐만 아니라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는 종종 어려운 성경이나 세계적인 상황을 접할 때 내 작은 삶의 생활상으로 이입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분단과 한반도의 상황이라는 큰 그림이 복잡하고 다루기 어렵다고 무조건 정치가나 지도자에게 떠넘기기보다 우리 삶의 일상이 세계 정치에서 벌어지는 틀과 많이 다르지 않음을 상기하면 어떨까.

부족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닫힌 문을 미리 두드릴 수 있는 힘과 여유를 가진 이가 누구인지, 그럴 힘이 없다고 해도 그 힘을 채워주시는 분이 계심을 믿는다면 지금 닫힌 문을 고요히 두드리며 함께하자라고 말할 사람이 바로 나, 바로 우리임은 확실한 것이다.


손서정(베아트릭스) 평화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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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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