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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편지] 고요를 그리며 /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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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가까운 외국인 친구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며칠 안내자 역할을 맡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가장 인상적인 볼거리로 거리의 간판을 첫손가락으로 꼽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덕지덕지 도배하듯 붙여 놓은 무지스럽게 크기만 한 간판들…. 그는 우리나라 정도의 소득 수준을 갖춘 나라에서 이처럼 요란하게 간판을 붙여 놓고 사는 나라는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그는 다만 “인상적이다”라든지 “재미있다”라고 말했을 따름이었지만 이 무질서하고 무지막지한 거리 풍경에 길들여져 무감각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수치심을 자극했다.

길거리의 간판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하철역에도, 열차 안에도 온통 광고판으로 도배를 해 놓았다. 이래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덕지덕지 벽면을 뒤덮어 놓은 상업 광고들은 가히 위협적이라 할 만하다. 심지어 역 안의 스크린 도어에 새겨 놓은 어설픈 시들까지 우리의 시선을 괴롭힌다. 그렇게라도 시를 읽게 하는 것이 정서 순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수준 낮은 시를 마구잡이로 새겨 놓은 것은 시인이나 독자 어느 편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뿐인가. 지하철역 안의 광장에서는 스피커를 꽝꽝 틀어놓고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는 무명가수들이 있고, 열차 안에는 잡상인들이며 구걸하는 사람들이 소음을 내며 지나간다. 시내버스들도 어마어마하게 큰 광고 그림을 붙여놓고 다니지 않는가? 새로 개업한 가게 앞에는 미니스커트 입은 아가씨들이 요란한 음악소리에 맞추어 이상하게 몸을 흔들며 춤추고 있고, 대형 마트건 동네의 작은 슈퍼마켓이건 가릴 것 없이 시끄럽고 요란한 음악을 사정없이 틀어 놓고 태연자약하다.

조용한 환경을 못 견디는 세태는 사람들의 내면에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 불안하기 때문에 군중 속에 파묻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군중에 섞이고 싶어 하는 심리는 고독과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홀로 있음이 두렵고 불안하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낮추기 때문이다.

고요가 그립다. 고요 속에는 나의 내면을 응시하는 거울이 있고, 그 거울 깊은 곳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이 있다. 고요 속에는 마음의 정화가 있고, 안온한 평화가 있다. 안온한 평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을 만나는 일을 외면하는 현대인의 삶은 풍요 속의 빈곤이다.

어딘가 한없이 깊고 안온하고 넉넉한 세상이 있다면 거기가 아마 천국이 아닐까?

깊고 안온하고 넉넉한 세상이 주는 아득한 평화가 곁에 있으면 좋지 않을까? 아득한 평화 속에서 누군가와 서로 쓰다듬어주고, 안고, 안기고… 눈 내린 풀밭을 걸어가듯이 편안하고 따뜻하고 환한 세상을 향하여… 생채기와 옹이와 핏자국과 눈물자국 모두 벗어놓고 그저 한없는 밝음 속으로 가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세상 마칠 때 은은한 고요와 아득한 평화가 곁에 있어주면 좋지 않을까? 살아서 천국을 누리는 사람에게나 찾아오는 이런 행복감에 쉽게 젖어볼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런 상태를 그리워하는 일은 귀한 순간이다.


조창환 (토마스 아퀴나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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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8-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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