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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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부활의 기쁨을 살기 위해

윤재선(레오, 보도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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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은 사월의 첫날, 부활과 함께 왔다. 부활과 함께 온 봄꽃의 행렬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희망의 꽃망울을 연신 터뜨린다. 요란한 봄비에 놀라 고개를 떨구고 스러져버린 꽃잎의 자취가 못내 아쉽다. 그래도 묵묵히 희망을 피워올리며 버티고 선 봄꽃들이 있어 대견하다. 세월호 분향소가 있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도 꽃비가 눈물처럼 흩날린다. 물 위로 몸을 띄운 연꽃은 눈물을 머금고 말없이 사람들을 맞는다.

가신 님들의 침묵.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의 한 대목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노란 리본의 물결 속에 순간 눈길이 멈춘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세월이 있습니다.’ ○○중학교 동아리 ‘리본’(reborn).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련만 불현듯 ‘리본’이란 이름이 뇌리에 콕 박힌 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 ‘리본’은 다시 태어남이다. 기억의 부활이고 정화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고 행동이다. 습관화된 망각을 떨쳐내려는 몸부림이다. 슬픔을 이겨내는 치유책은 진실뿐이라고 ‘리본’은 소리 없이 외친다. 리본은 더 이상 분노의 상징이 아니다. 분노가 촛불이 되면 다시 기도가 되고 희생이 되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된다. 사랑의 마음으로 촛불을 옮겨 붙일 때 그것은 연대가 되고 소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앎과 행동, 인식과 실천, 그 사이의 괴리감은 늘 부끄러움으로 남는다. 그래서일까. 주님 부활의 거룩한 밤에 밝혔던 촛불 앞에 다시 선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마땅히 기쁨이어야 함을 알면서도 슬픔과 어둠에 갇혀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기쁘고 즐거워해야 할 부활시기에 연중시기의 여느 때처럼 다시 편안한 일상으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버린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물론 부활의 기쁨을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강조한다고 해서 기쁨이 생기는 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에 맞게 살아갈 때 따라오는 결과임을 자각한다. 부활은 자기중심적이었던 삶에서 남을 배려하고, 위해 주는 이타적인 삶으로 옮겨감 또는 건너감의 파스카가 아니던가. 상처받을까, 손해 볼까, 비난받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삶이 바로 부활임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부활의 기쁨을 살려면 무엇보다 내 안의 두려움부터 이겨내야 한다. 변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결심부터 무덤에 묻어야 한다. 악습도, 죄에 물든 과거도 예수님의 시신과 함께 돌무덤에 묻어버리자. 그렇게 해야 겨우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까.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그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아들러 심리학의 연구가이자 철학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공동 저서 「미움받을 용기」에서,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인지,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인지,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풍요롭게 하는 건 ‘지금, 여기’를 사는 나이기에.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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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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