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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많은 한국 신자들과 함께한 57년, 행복했습니다”

한국 선교 생활 마치고 고국 아일랜드로 돌아가는 전 고르넬리오 신부(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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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년간 한국 선교사로서의 삶을 마감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고르넬리오 신부가 한국 신자들과 고별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1983년 부활절 때 광주대교구 목포 연동성당에서 1000여 명의 예비신자에게 세례를 줬습니다. 아이도 73명이나 있었고요. 선교사로서 정말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지난 16일 서울 동소문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 전 고르넬리오(Cornelius Murphy, 83) 신부는 한국 신자들과의 고별 미사를 봉헌하면서 57년간의 한국 선교사 생활에 대한 추억에 빠져들었다.

1954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입회해 1960년 12월 사제품을 받은 그는 1961년 11월 26일 한국 선교사로서 부산 땅을 밟았다. 고국 아일랜드에서 배를 타고 두 달 보름이라는 긴 여정 끝에 도착한 한국은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는 가난한 나라였다. 5ㆍ16 군사 혁명 직후라 나라도 어수선했다.

1961년 당시 한국 교회 사제는 모두 250명. 그중 외국인 선교사가 150명이었다. 한국어도 제대로 배울 겨를 없이 본당으로 파견된 그는 2004년 서울대교구 호평동본당(현 의정부교구 관할) 주임으로 은퇴할 때까지 전국 10개 본당에서 사목했다.

“본당 사목 경험도 전혀 없고 한국말도 모르던 제가 선교사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정 많은 신자들 덕분입니다.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텐데도 강론이 좋았다며 격려해 주곤 했지요. 인심 좋은 신자 공동체가 선교사를 받아준 것이죠. 덕분에 은퇴할 때까지 한국에서 사목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기뻐요.”

고르넬리오 신부는 초기 20년간 춘천교구에서 활동했다. 강원도 오지를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성사를 베풀었다. 당시 강원도는 모두 비포장도로여서 늘 삽을 챙겨다녀야만 했다. 차가 웅덩이에 빠졌을 때나, 눈길을 헤쳐나가기 위해선 삽이 필수품이었다.

“제가 보기엔 한국은 한강의 기적보다 신앙의 기적을 이룬 곳입니다. 1961년 당시 한국인 사제가 100명에 불과하던 것이 현재 4700여 명이나 됩니다. 신자 수도 인구의 10가 넘습니다. 이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한국은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고르넬리오 신부는 “노쇠한 자신이 짐이 되어선 안 된다”고 결심하고 자원해 고국으로 귀환하기로 했다. 자신보다 먼저 1957년 한국 선교사로 와서 똑같이 춘천과 인천교구에서 36년간 선교사로 활동하다 본국으로 귀환했던 친형 전 야고보(James Murphy) 신부처럼 한국 공동체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다.

“한국 신자들이 제일 그리울 겁니다. 몸은 아일랜드에 있지만, 마음은 죽을 때까지 한국에 있을 겁니다.”

가슴이 먹먹한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보인 고르넬리오 신부는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작별 인사를 했다.

고르넬리오 신부는 19일 항공편으로 아일랜드에 귀환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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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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