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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단상] 괜찮아요(김해선, 비비안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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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겨울 스페인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큰 성당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따라가자 작은 경당이 있었고, 등이 구부정한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주름진 손으로 피아노를 치고 계셨습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에 신자는 없고 관광객들만 들락거리는데, 성당 뒤편 작은 경당을 지키며 추운 날씨에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서 피아노를 치고 계신 노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평생을 농촌의 벽지에서 사목활동을 하시다 조용히 돌아가신 간다니엘 신부님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간다니엘 신부님께서는 아주 오래전 전라남도 강진에서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간 신부님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파스카 성야 미사 안에 세례식까지 있어서 매우 늦은 시간에 미사가 끝났지요. 그 당시에는 마을버스가 없었기 때문에 신부님은 차가 다니지 않는 산골까지 손수 운전하셔서 신자들을 집 앞까지 태워다 주셨습니다. 그때는 세례를 받은 기분에 들떠서 ‘신부님께서 얼마나 피곤하실까?’ 그런 생각은 꿈에도 못 했습니다. 어쩌면 ‘신부님이니까 당연하게 우리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셔야지’하는 생각이 마음 밑에 숨어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신부님은 말씀이 없으셨고 늘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다니셨지요. 어느 날 신부님께서 가정 방문을 오셨는데 부모님은 논에 나가셔서 집에 계시지 않았고, 갑자기 오신 신부님께 음료수 한 잔도 드릴 수 없는 상황에 제가 몹시 당황하자 신부님께서는 “비비안나, 괜찮아요”라고 아주 작게 말씀하시고 그냥 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신부님을 피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했다는 죄송한 마음과 부끄러움이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학교 선생님도 아니신데 왜 가정 방문을 하실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남도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농촌으로 사목하러 오신 푸른 눈빛의 미국 신부님께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씩 방문하며 혼자서 사목하셨다는 것을 많은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여행 중에도 그랬지만, 돌아와서도 노 신부님의 구부정한 뒷모습에 간다니엘 신부님의 모습이 겹쳐 자주 눈에 스쳤고, 미사 후에도 간 신부님 생각으로 성당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신앙은 나 혼자 힘이 아니라는 것, 열정적인 활동도 중요하고 열정적인 태도도 중요하지만, 조용히 사목하시고 조용히 기도하셨던 간 신부님의 든든한 기도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신부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난 후에 하게 되었지만, “비비안나, 괜찮아요”라고 신부님은 오늘도 저에게 가만히 말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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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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