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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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단상] 붉은 포도밭을 지나며(김해선, 비비안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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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초여름에 40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그날도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걸어서 숙소가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6월 10일쯤 되는 날이었지만, 그날 오후는 가을 날씨 같았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가게로 갔습니다. 작은 마을에 있는 조그만 가게였는데 여행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는 청사과 두 알과 요플레, 납작 복숭아 몇 개를 다음날 간식으로 사 들고 나와 동네를 산책했습니다.

오래된 수도원 성당이 보였습니다. 마당에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굴러다녔고 검은 수단을 입은 키 큰 신부님께서 마당을 쓸고 계셨습니다. 저는 가만히 작은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당 벽과 천장에 금이 간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시멘트로 덧칠해져 있었고 아무도 없는 성당 창밖으로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창문 위에 거미줄이 걸쳐있는 고요한 성당에서 저는 저도 모르게 검은 봉지에 담긴 사과와 요플레를 만지작거리며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사람도 없는 성당 마당을 쓸고 계신 푸른 눈의 수사신부님처럼 저도 저의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 저의 글을 세상이 알아주는 것과 알아주지 않는 시선에서 벗어나, 저도 밖에서 혼자 마당을 쓸고 계시는 수사신부님처럼 저의 길을 묵묵히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며칠 후 햇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포도밭을 지나면서 ‘시 등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기쁘거나 설레지 않았습니다. 17년 동안 신춘문예와 잡지에 투고해서 떨어졌기 때문인지 오히려 조금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매일 새로운 길을 걷는 순례의 길에서 만난 이 기쁜 소식에 감사할 줄 모르는 제가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름 모를 작은 수도원 성당에서 했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왜 내가 원했던 것을 받았는데도 기뻐하기보다는 침울해 할까, 스스로 되묻곤 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등단 소식을 들었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고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늦게 등단한 저에게 원고 청탁 기회도 잘 오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번 수도원 성당 맨 뒷자리에서 했던 기도도 진심이지만, 지금 현실을 보고 있는 이 마음도 진심입니다.’ 예수님께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하고서야 마음속 침울함이 빠져나갔습니다.

요즘도 가끔 수도원 성당 마당을 혼자서 묵묵히 쓸고 계시던 등이 굽은 수사신부님의 모습이 스쳐갑니다. 그리고 글쓰기가 뜻대로 잘 안 될 때마다 낡고 오래된 성당 뒷자리에서 드렸던 기도를 떠올리며 저의 초심을 마주 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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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9-18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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