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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진단] 아파트도 장례는 치르고 보내줘야(정석, 예로니모,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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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차 1978년 6월 30일 장성 화광아파트는 이 세상에 태어나 40여 년의 세월 동안 열악한 지하작업 환경 속에서 불철주야 피땀 흘려 일했던 우리 산업전사 광산 근로자들에게 항상 편안하고 안락한 안식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우리와 동고동락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화광아파트가 이제 그 소명을 다 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2019년 10월 19일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에서 아파트 장례식이 열렸다. 40여 년을 살아온 삶 터가 재건축으로 철거되기 전에 주민들이 상주가 되어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화광아파트 이름이 새겨진 동판으로 영정을 대신했고, 주민들은 아파트 모양의 상여 뒤를 따라 곡을 하며 단지를 한 바퀴 돌았다. ‘근조 화광아파트’  ‘삼가 아파트의 명복을 빕니다’ ‘안녕 화광! 고마웠다’ ‘화광아파트 잘 가시게’ ‘네가 있어 행복했다’고 적힌 만장들도 상여 뒤를 따랐다. 아파트 주민들뿐만 아니라 태백시민들, 한때 거기 살았던 사람들, 처음 접한 아파트 장례식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온 사람들까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장례식을 치렀다. 곧 철거가 시작되지만, 아파트 두 동은 철거하지 않고 남겨 편의시설 등으로 활용할 예정이란다.
 

아파트 장례식 소식을 듣고 그날 풍경을 전하는 방송 영상을 보는데 무언가 가슴께를 묵직이 누르는 느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파트 장례식이라…. 아파트 장례식, 아니 동네 장례식 얘길 처음 들은 건 대학원 연구실 선배인 경기대 이상구 교수에게서였다. 서울 사직동, 거여동, 상계동, 신월동 등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옛 동네들을 꾸준히 실측하고 기록해온 그는 2018년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서 뉴타운 사업으로 사라진 교남동의 흔적들을 정성껏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건물 한 채 한 채를 실측해서 그린 야장과 도면들이, 골목을 걷는 사람과 자전거까지 세세히 표현한 모형들이 사라진 동네의 기억을 애틋하게 전했다. 철거된 한옥에서 가져온 목재와 타일들을 쌓아둔 유리상자는 꼭 시신을 모신 관처럼 보였다. 힘든 일을 왜 계속하는지 묻는 후배의 어리석은 질문에 선배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는데, 사람들이 살던 동네가 죽었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고 보내서야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랬다. 우리는 오래오래 살아온 우리 동네가 죽어도 장례조차 치르지 않고 서둘러 떠나보냈다. 기억조차 남기기 싫었는지 건물 하나, 나무 하나 안 남기고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그뿐인가. “경축, 우리 아파트 안전진단 불합격” 현수막을 내걸며 우리 동네의 죽음을 반기고 자랑했다. 탄광촌 아파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정성으로 장례를 치러준 화광아파트 주민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장례도 치르지 않고 동네를 떠나보낸 사람들이라는 깊은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의 도리를 다해준 그분들이 고맙다.
 

‘공간(space)’과 ‘장소(place)’는 다르다. 준공된 아파트의 칸칸들은 다 같은 ‘공간’이다. 그곳에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공간은 점점 ‘장소’로 바뀐다. 삶이 스미고 추억이 쌓인 곳이 바로 ‘장소’다. 장소에 어린 특별한 의미를 ‘장소성(sense of place)’이라고도 하고 ‘장소의 혼(genius loci)’이라고 한다. 40여 년을 살아온 우리 아파트에 어린 혼은 누구의 혼인가? 누가 애도해야 하는가? 바로 우리다. 우리 동네이기 때문이다. 향년 41세, 화광아파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사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에 우리 주민들은 화광아파트의 죽음 앞에 그동안 감사했던 마음들을 모아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화광아파트여,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천지신명께서는 우리 화광아파트를 어여삐 여겨 삼가 거두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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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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