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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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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모두 모두 한 형제랍니다 / 김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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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가족 모임 동영상을 다시 봤습니다. 아, 다들 어리고 젊었고 미래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저런 시절이 있었지. 설날 한복 차려입고 세배하고 음식 먹고 웃고 떠드는 가족들 모습을 보며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졌습니다.

오글거리는 손주들을 대견해 하며 평안도 억양으로 “노래 하나 불러 보라.” 하시던 아버지. 그 뒤 세월이 흘러 당신은 긴 투병 끝에 손가락 발가락이 새까맣게 오그라든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초롱초롱하던 조카 하나는 희귀난치병으로 사회생활을 포기했고, 똘방똘방하던 땅꼬마 녀석도 그저 그런 반 지하방 청춘이 돼 힘든 생존경쟁의 한가운데 내몰려 있습니다.

화면 속 그윽한 눈빛을 주고받던 동생 부부는 지금은 헤어져 따로 살고 있고, 우리 어머니께 다소곳하던 30대 중반의 예뻤던 내 처는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하고,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니와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아오면서 미운 정도 담뿍 든 할머니가 됐습니다.

삶은 순간순간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다 주기도 하지만, 지내 놓고 보면 결국은 다 스러져 간다는 점에서 슬픔이기도 합니다. 오래 전 저 화면 속의 웃고 떠들며 행복했던 우리 가족에게 뒤에 다가온 병, 늙음, 죽음, 헤어짐, 힘든 삶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엊그제 전철을 탔는데 할머니 한 분이 열심히 휴대폰을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누구누구 빨갱이 새끼”라 욕도 하고 “집사님 어디서 보자”고 통화하는 걸로 보아 태극기 집회에 가는 개신교 할머니 같았습니다. ‘그래, 하릴없이 늙고 잊혀 가던 서러운 처지에 새삼 삶의 존재 가치를 확인시켜 주는 뜨거운 사명이 부여된 셈이니 참으로 행복하시겠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 할머니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 아닌가요. 예수님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밀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같이 가주고,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 벗어주라 하셨지요. 그런데 당신 제자가 왜 저리도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말에는 미움이 사무쳐 있을까요. 저 할머니도 나름대로는 속이 많이 상해서 저러는 것이겠지요.

우리 가족이며 저 태극기 할머니며 그 누구에게도 이 세상은 결코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저렇게 발버둥치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이 삶의 지난함은 어디서 연유한 걸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지은 원죄 때문이라고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 지심으로 이 원죄에서 비롯된 나의 죄를 사해주신다고 믿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교리의 깊은 뜻을 잘 새기지 못하면 자칫 저 태극기 할머니처럼 아전인수식 구원의 확신에 차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악마’들을 저주하는 신앙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궁리 끝에 이리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아담의 행위 때문에 나까지 그 책임을 물려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아담의 원죄란 아담으로 대변되는 우리, 이 개체들이 전체이신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저마다 ‘나’를 주장하는 순간 짊어져야 할 ‘개체들의 원초적 짐’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개체인 한, 늙고 병들고 헤어지고 굶주리고 나와 다르다고 서로 미워하는 건 우리의 숙명이고 우리의 원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측은한 개체들의 발버둥침을 불쌍히 여기시고 ‘너와 나 그리고 삼라만상, 이 모든 개체들이 서로 다 다르지만, 실은 전체이신 아버지 품에서 나와서 결국에는 다시 그 품으로 돌아갈 한 형제’라고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 주신 거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체의 원죄를 지고 있는 불쌍한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지요. 25년 전 동영상 속 젊었던 나도 내 처도, 초롱초롱 똘방똘방하던 내 아이들이며 조카 녀석들도,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 바라보던 이제는 헤어진 내 동생 부부도, 힘들게 삶을 마친 우리 아버지도, 그 길 끝에 서 계신 어머니도, 저 태극기 신자 할머니도 모두 모두 다 당신 품에서 나와 다시 그리로 돌아가고 있는 긴 여정 속의 한 형제들이랍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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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12-30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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