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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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단상] 침묵 속에 만나는 하느님(안현모, 리디아,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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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우리 집 가훈 알아오기’ 숙제가 있었습니다. 한 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매번 같은 문장을 적어 주셨습니다. “침묵은 금이다.” 아버지 특유의 굵은 베이스톤 목소리로 짧은 설명도 곁들여 주셨지만, 어릴 때는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몰랐습니다. 침묵이 진짜로 금이라는 게 아니라, 황금처럼 좋은 것이라는 것까지만 알아 두었죠. 그런데 애써 기억하거나 실천하려 한 것도 아닌데, 이게 자라면서 은근히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이 세상의 여러 멋진 격언들을 접할수록, 왜 하필 그 한 문장이 아버지의 선택을 받았을까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그 말의 의미가 점차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는 직업상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중을 상대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제가 방송국 기자였을 때도, 기자의 본질은 취재,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관찰과 청취가 우선이었습니다. 통역사로서도 마찬가집니다. 전달하려는 원문을 머릿속에 똑바로 입력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저의 직업은 ‘듣기’가 중요한 셈입니다. 문제는, 잘 들으려면 말을 멈춰야 한다는 점이죠. 즉, (‘동시’ 통역의 애로사항이기도 합니다만) 입을 닫아야 귀가 열리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다른 수많은 미덕을 놔두고 ‘침묵’이란 두 글자를 강조하신 이유를 이제야 조금씩 헤아릴 수 있게 된 건, 직업적인 특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입을 다물수록, 제 몸 겉에 달린 귀만 열리는 게 아니라, 제 몸 안에 있는 마음의 귀도 열린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침묵 속에 침잠할 때 비로소 영성의 귀가 깨어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바깥귀가 아무리 다양한 소리와 정보를 매일 흡수한다 해도, 이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귀는 바깥귀가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의 깊은 자아가 속삭이는 말도 들을 수 있고, 더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하느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께서는, 딸이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을 마주할 때마다, 침묵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길 바라셨던 겁니다.

요즘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묵’의 가치가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불필요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보면서. 잘못된 말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감히 말로써 어찌 손쓸 방법이 없는 전 세계적 위기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저 말없이 기도라는 침묵에 몸을 담그고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여러분도 요즘처럼 외출이 자제되고 사람과의 모임이 줄어든 시기일수록, 침묵 속 하느님과의 대화 시간을 늘려보시면 어떨까요. 평상시 피로감으로 다가왔던 일상도, 미움으로 받아들였던 한마디도, 기도가 주는 금빛 온기 속에서 따뜻한 그리움으로 데워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거리낌 없이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우리 입 밖으로 나오는 말에도 그 온기가 남아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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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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