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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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기자 단상] 내년 이맘때쯤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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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나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출발 서너 달 전부터 친구들과 꼼꼼하게 준비했지만 처음으로 여섯 명이 함께 하는 여행이어서 기대도 되고 염려도 됐다.

시차가 바뀌어서 새벽녘이면 눈이 떠졌다. 창밖은 푸르스름했다. 잠을 청하다 포기하고 거실로 나왔더니, 친구가 졸린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기도할 거니? 같이 하자.”

묵주를 넣어오다니?. 친구는 냉담 중이었다. 사도신경을 하는데 친구 남편이 무심한 표정으로 부엌을 왔다 갔다 했다. “같이 하실래요?” 함께 새벽기도로 여행의 아침을 맞았다. 다음 날에는 남편이 우리 둘레를 서성댔다. 성당을 열심히 다니건 열심히 다니지 않건 모두 신자여서 좋았다.

운 좋게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하게 되었다. 제대에서 각 나라말로 보편지향 기도를 할 때는 얼마나 부럽던지. 나는 갑자기 애국자라도 된 양 이어지는 라틴어 미사를 우리말로 크게 따라 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에 강복하소서.” 남편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식사 전 기도를 하다니. 영성체 전이라 아주 틀린 건 아니라며 모두 웃었다.

성당 문이 닫힌 지 3주째, 외출을 삼가고 집에만 있는 나는 바깥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밖은 혼란스러운데 안은 고요하기만 하다. 이마저도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 마음먹지만, 외딴 섬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려니, 마음도 멀어졌다. 실제로 한 달 남짓이건만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게 까마득히 옛날 같다. 언제 그런 적이 있었나, 할 만치.

다행히 지난주부터 교구에서 유튜브로 미사를 방영했다. 주일 아침 집을 청소하고 남편과 나란히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얼굴 익숙한 주교님을 뵈니 너무 반가워 굳었던 얼굴이 절로 풀렸다. 말씀과 강론을 그렇게 열심히 귀 기울여 들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비록 성체를 영하지 못해도 보는 것만으로 큰 위로를 얻었다. 우리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함께’라는 걸 깨달았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14일간 자가 격리 중이었다. “어찌나 너희들이 보고 싶은지.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란 걸 몰랐어.” 우린 마스크 쓴 얼굴을 셀카로 찍어 주고받았다. 코로나 인증샷, 이라며. 그동안 늘 문자로만 안부를 주고받다가 전화로 친구 목소리를 들으니 즐겁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나도 너희들이 보고 싶어.

요즈음은 하루가 무척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길어 보이는 시간도 결국 매 하루로 이루어지니까. 두꺼워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펼치고, 짬짬이 인적 드문 곳을 찾아 산책 한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돌아보기도 하면서.

내년 이맘때쯤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음? 그때 굉장히 힘들었지. 하지만 이겨냈어!” 하지 않을까.

푸른 새벽 묵주를 든다. 고통받는 이들과 그들을 위해 땀 흘리는 이들을 위해. 기도를 마치자 하얗게 아침이 찾아왔다. 늘 그렇듯이.


■ 가톨릭신문 명예기자들이 삶과 신앙 속에서 얻은 묵상거리를 독자들과 나눕니다.


윤선경(수산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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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3-2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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