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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내 형편에 맞게 나를 살리시는 그 분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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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뿌리, 한 가지에서 난 형제들도 생각이 같지 않다. 그건 영혼의 뿌리를 한곳에 심은 신앙 형제들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오래 몸담아온 가톨릭언론인회의 회원들을 봐도 그렇다. 같은 신앙에다 ‘언론’이라는 직업적 소명까지 같지만 그 신앙의 결은 조금씩, 때로는 많이 다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집안의 종교적 배경, 성장과 교육의 환경, 소속 언론사의 이념적 지향 등….

가톨릭언론인회 회원 중에는 신학교에서 신부수업을 했던 이도 많고 몇 대에 걸친 구교우 집안 출신도 많다. 다른 교우단체도 이럴까, 싶을 정도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또는 태중에서부터 익힌 성경과 전례·성사생활이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체화한 것은 물론, 전국 각 교구의 동향과 신부님들의 신상정보에 대해서도 훤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뒤늦게 세례를 받을 당시만 해도 친가나 외가, 처가에 이르기까지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라도 예수님을 믿는 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 골수에 박힌 전통 유림의 후예이거나 일부는 불교신자였다. 그러니 언론인회 교우들과 어울릴 때면 나는 내가 쑥맥 같기만 했다.

지난 1995년, 나이 43살 때였다. 미국 클리블랜드 대학에서 1년간 연수를 하던 중 현지 교민 한사람이 성당 안으로 내 등을 ‘확’ 떠밀어 넣었다. 나는 “어, 어…” 하다가 6개월간 예비신자 수업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 교민도 눈치를 챘을 성 싶다. 미국에 오기 전 나는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신문사 노조위원장으로서 해직 동료기자 5인 복직투쟁과 조간화에 따른 노사협상에 전전긍긍하는 건 너무 힘들었지만, 사람을 지치게 하지는 않았다. 그 과정에서 겪은 사람들의 음해와 배반이 이 세상과 사람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런 만큼, 세례는 내 인생에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나는 귀국한 뒤 열심히 매달렸다. 이 동아줄을 놓치면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다 언론인회가 주관하는 ‘신앙학교’엘 다니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사회교리’를 만났다. 그날의 사회교리 강의는 내 신앙의 틀을 확인하고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례와 성사생활이 아직 낯설고 서툰 나에게 사회교리는 “전례와 성사만이 신앙생활이 아니며 삶의 모든 자리에서 복음적 가치를 실현하고 삶의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또 사회교리의 과제는 바로 내 직업적 소명인 저널리즘의 과제와도 흡사했다. 복음에 나타나 있듯이 ‘정의로운 사회적 행동의 의무를 제시하고’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구조가 복음의 메시지와 모순될 때 공동선을 위해 정의의 이름으로 고발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논설위원으로 일할 때에는 사무실에 사회교리 책들을 쌓아놓고 공부했다. 그리고 회의에서 논설위원들이 각자 논설주제를 제안한 뒤 토론을 벌일 때면 미리 공부한 사회교리의 논리를 바탕으로 열심히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사형제도 반대’와 ‘생명윤리’ 등 여러 사회적 과제에 관한 경향신문의 논지가 세워졌다.

그러나 본당에서 만난 교우들 중 사회교리에 대해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본당에 수많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도 사회교리 강좌는 잘 보지 못했다. 심지어 언론인회 회원 중에서도 사회교리에 대해 폄훼하면서 ‘빨갱이 교육’이라고까지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보기에 그런 분들은 대개 신앙생활을 전례와 성사에 집중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 나라의 발전’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선행과 봉사도 부지런히 한다. 이런 분들을 두고 성당에서는 ‘열심한 신자’라고 지칭한다. (이럴땐 왜 ‘열심히 하는’이나 ‘열심인’이라고 하지 않고 ‘열심한’이라는 비문을 써야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인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분들은 시대의 징표와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말하려하면 “정치적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제지하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나는 그들보다 ‘열심한 신자’인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다만 그 분이 내 형편에 맞게 나를 살려주시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지영(이냐시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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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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