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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오직 나의 전부, 나의 진심이라면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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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없고, 재능도 없고, 못생겼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곡예사 바르나베는 오갈 데가 없어 한 수도원에 의탁한다. 보아하니 수도원의 수사들은 저마다 멋진 지식과 재능을 발휘해 성모님께 봉헌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건축 일과 음악 연주를 하는 등.

바르나베는 봉헌할 것 한 가지 없는 자신을 한탄한다. 어느 날 수사들은 바르나베가 보이지 않아 찾아 나섰다가 성당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거기엔 괴이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성당 안 성모상 앞에서 바르나베가 물구나무를 선채 발로 공과 칼을 열심히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구나무서기로 칼과 공 돌리기는 바르나베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재주. 바르나베의 ‘신성모독’에 분개한 수사들이 그를 끌어내려 뛰어들려는 순간, 믿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벌어졌다.

온힘을 다해 재주를 부리던 베르나베가 지쳐 쓰러지자 성모상이 움직여 베르나베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푸른 옷자락으로 바르나베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것이었다.”

「성모의 곡예사」라는 위 단편소설은 프랑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이다. 원래 유럽에서 중세 때부터 구전돼온 설화를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 단편을 세례를 받기 훨씬 이전에 우연히 읽었는데 그 감동이 가슴에서 콧잔등에까지 시큰하게 번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세례 후에는 성경 구절 중 ‘과부의 헌금’(루카 21,1-3) 말씀이 유난히 폐부에 와 닿았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들은 돈 같은 물질의 크기, 세속적 가치보다는 ‘나의 전부, 나의 진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나는 세례를 받은 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이야기들로부터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이 이야기들은 언제나 “괜찮아, 다른 건 중요치 않아. 나의 전부, 나의 진심이면 되는 거야”하고 나를 격려해주었다. 내가 진심을 다해 바칠 수 있는 것? 돈이나 다른 어떤 재능보다는 역시 ‘쓰는 일’ 또는 ‘매체와 관련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우선 천주교계의 원고주문에 충실히 응하는 게 현실적으로 중요할 듯 했다. 또 직업적 소명에 따라 쓰는 내 글에 (사회교리 등) 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반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 먼저 원고청탁을 받고 글을 쓴 교회매체는 서울대교구 주보였다. 서울주보에 주1회 한 달간 쓰고 나니까 교회 안팎 이런저런 매체들의 원고청탁이 줄을 이었다. 처음에는 교리도 잘 모르고, 교회 안 여러 사정에 대해서도 어두워 원고를 쓰기가 겁이 났다. 잘못하다 망발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다. 이 때문에 자료를 찾아본다, 주위에 물어본다 하면서 꼬박꼬박 취재를 하면서 글을 쓰느라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 덕분에 부족했던 공부는 많이 했던 것 같다.

현직 기자가 외부의 원고청탁을 받아놓으면 여러모로 부담이 된다. 돌발적인 사건이나 계획에 대응하느라 자칫 외부원고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잠이 부족해 심신의 피로가 가중된다. 그래도 나는 교회내의 원고청탁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응했다. 나의 전부를 보태,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나마 이 정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평화방송의 TV나 라디오에도 출연하곤 했는데 출근시간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근 1년간 출연해 정치논평을 했던 건 특이한 ‘봉헌’이었다.

사회교리를 접하고 난 뒤에는 내가 경향신문에 쓰는 사설이나 칼럼은 물론, 외부 원고의 초점을 사회교리에 맞추었다. 사회교리에 맞춘다고 할 것도 없었다. 인간존엄성 원리와 공동선의 원리 등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행동하는 원리 체계는 사실 저널리즘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논설위원으로 일할 때 책상에 사회교리 관련 서적을 쌓아놓고 공부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지영(이냐시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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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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