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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잊혀가는 ‘광희문 성지’에 순교 현양관 건립하자’- 한정관 신부

순교자 죽음,주검으로 성화된 광희문, 현양은 우리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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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서울 도성 안 시신이 나가던 문인 광희문.




▲ 광희문 앞의 표지판.

 
 
현재 서울 중구 광희2동에 자리 잡고 있는 광희문은 1456년쯤에 세워진 성문인데 서울의 4소문 가운데 하나인 남소문(南小門)의 다른 이름이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위치한 이 남소문에 광희문이라는 현판이 1719년에 걸렸고 따라서 그 이후로는 남소문보다 광희문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한편 광희문은 서울의 서소문과 함께 서울 도성 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성밖으로 운반해 나갈 수 있는 문으로 지정돼 있었다. 그래서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한다. 또한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는데 그것은 현재 동대문역사박물관 구내의 이간수문(二間水門)이나 청계천의 오간수문(五間水門)과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성문은 위치로 보아 수구(水口)와 관련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이간수문 등과도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 따라서 수구문의 유래에 관한 기존 설명에는 오류가 있다고 본다. 오히려 수구문이란 아마도 시구문이라는 명칭이 변해서 형성된 변음(變音)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울 도성 안에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시체를 이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렸다고 한다. 또한 천주교 박해 당시 포도청이나 한성부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거나 옥사한 신자들의 시신도 이곳에다 버렸다.

 예를 들면, 1839년 기해박해 때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1846년 병오박해 때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한 성녀 우술임(수산나), 성녀 김임이(데레사), 성녀 이간란(아가타), 성녀 정철염(가타리나) 등 순교 성인들의 시신이 이곳에 방치돼 있었다. 1867년 포도청에서 순교한 송백돌(베드로)의 시신 역시 광희문 밖 성벽 밑에 묻혔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1866년, 1868년 등의 박해 때 도성 안에서 순교한 적지 않은 신자들의 시신 역시 바로 이곳에 내버려졌다. 순교자 가족들이 시신을 찾아가지 않을 경우 그 순교자들은 이 광희문 근처에 매장됐다고 한다.

 이곳에 버려졌던 우술임을 비롯한 여러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은 오늘날 찾을 길이 없다. 당시 관습에 비추어볼 때 그들은 아마 이 인근 지역 어딘가에 매장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결과, 광희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누일 자리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한 여러 순교성인들이나 무명 순교자들을 기념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가 됐다.

 광희문 밖은 이렇게 순교자들의 죽음과 주검을 통해 성화됐다. 이 성화된 땅에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순교현양관을 마련하는 일은 믿음의 후손들이 마땅히 완수해야만 할 과업이다. 이곳은 순교자들의 믿음을 다시 해석함과 아울러 순교자들이 믿음과 사랑을 함께 받들고 실천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소다. 이것이 이곳 광희문 밖에 순교자들을 기릴 수 있는 순교현양관을 설치해야 할 첫째 이유다.

 또한 오늘날 순례자들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제시해 주는 순교성지들을 즐겨 찾는다. 그러나 순교 당시의 상황을 체험할 수 있는 당대의 유적이나 유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거의 모든 순교 사적지는 원형이 철저히 파괴돼 있다. 이와 달리 광희문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운반돼 나갔고 성밖 인근에 그들의 시신이 버려졌던 곳으로서 당시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물론 광희문의 경우에도 1976년을 전후해 유적 가운데 퇴락한 곳들을 복원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후세 사람들의 조형물로만 채워져 있는 다른 순교성지들과 달리, 박해 시대 당시의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어 당대의 한국사와 순교의 교회사를 함께 회상하기에 매우 적합한 자리다. 이것이 이곳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해야 할 둘째 이유다.

 광희문은 현재 서울시와 중구청이 정비를 마치고 2014년 2월 17일부터 하루 24시간 개방돼 있다. 그래서 광희문은 이제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누구나 늘 가까이 접근해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친근한 조선시대 건조물이 됐다. 또한 접근성이 매우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 광희문 역사 유적지를 찾아와서 휴식을 취하며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다. 비록 작은 규모라 해도 순교현양관이 이곳에 세워진다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순교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알려줄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이 될 것이다. 이 점이 이곳에 순교현양관을 세워야 할 셋째 이유다.

 한편, 서울대교구를 비롯해 한국교회는 국내의 순교 사적지들에 대한 순례를 신자들에게 적극 권장하고 있다. 순례자들은 순례지를 방문해 신앙 선조들의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려고 한다. 이러한 도보 순례자의 숫자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곳 광희문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현장에서 간단한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는 장소를 갈망하고 있다. 그들은 이곳을 방문했음을 확인해주는 스탬프를 받기 위해 상당히 멀리 떨어진 신당동 성당에까지 와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곳에 순교현양관이 세워진다면, 순례자들은



가톨릭평화신문  201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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