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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124위 열전 <29> 유항검·유문석·유중성

전라도 신앙 공동체 중심이 된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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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8ha. 1ha가 3025평이니, 무려 450만여 평의 땅이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의 소유였다. 전주 인근 10여 개 고을에 걸쳐 1만5000마지기(1마지기 300평 기준으로 1487만633㎡)를 소유한 대부호였던 셈이다. 이처럼 ‘남부러울 것 없는’ 대부호였던 그는 왜 순교의 길을 걸었을까? 그 많은 땅과 재산, 명예, 목숨까지 바치며 온 가족이 다 함께 신앙을 증거해야만 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그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

유항검 일가 가운데서 순교자는 모두 10위다. 유항검을 비롯해 부인 신희, 맏아들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루갈다, 1782∼1802) 동정부부,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1784∼1801), 동생 유관검ㆍ이육희 부부와 그의 아들 종선ㆍ문철, 장조카 유중성(마태오, ?∼1802) 등 일가족이다. 이 가운데 유항검과 유중철ㆍ이순이 동정부부, 유문석, 유중성 등 5위가 이번에 시복됐다. 유항검의 남은 가족들은 노비로 끌려갔으며, 적몰 재산은 모두 호조에서 환수했다. 그가 살았던 집은 헐어 없애고, 그 터에는 연못을 만들었다. 유중철ㆍ이순이 동정부부는 이미 조명한 바 있기에 이번에는 유항검ㆍ문석 부자와 조카 유중성의 삶을 들여다본다.

 
▲ 복자 유항검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태생인 유항검이 입교한 것은 1784년 조선 천주교회 창설 직후다. 호남 지역 첫 신자, 곧 ‘호남의 사도’가 된 것이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척, 이웃, 자신의 종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다. 이제 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교회 가르침을 실천하고 모범을 보였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에게조차 자선을 베풀었다.

1786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했을 때 그는 호남의 사제로 임명돼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줬다. 이른바 ‘가성직 제도’였다. 하지만 얼마 뒤 교회 지도층은 이런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에 따라 유항검도 자신의 성무를 중단했다. 이로부터 조선 교회는 성직자 영입 운동을 본격화하는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베이징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유항검이 댔다. 1790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유항검은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1791년 이종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후 피신했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하자 유항검은 아우 유관검을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했고, 마침 조정에서 주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신부 또한 박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선다. 당시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주 신부가 전주에 도착하자 유항검은 주 신부를 모셔와 인근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던 차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맨 먼저 체포됐으며,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돼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쳐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해 10월 24일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 복자 유문석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이 된 아버지 유항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난 유문석은 1801년 박해 당시 다행히 체포되지 않아 여름 내내 전주 옥에 갇힌 부친과 친척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됐으며, 그해 11월 14일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 복자 유중성
 
어려서 부친이 사망하면서 작은아버지 유항검의 집에서 자라난 유중성은 가족들과 함께 순교를 다짐했으나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나야 했다. 이에 그는 “관장이 법에 따라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쳐 다시 옥에 갇혔다가 1802년 1월 31일 전주 형장 숲정이에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나이 18세였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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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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