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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쓰는 수원교구사] 천진암성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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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자봉을 향한 산길을 올라간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 천진암성지의 입구에 다다랐다. 하지만 순례길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차로 성지 입구에 도착한 이들도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순례해야한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 교리를 배우기 위해, 또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천진암을 찾았던 신앙선조들을 기억하면서 오로지 두 다리로 올라야 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또 오르막길을 걷는다. 천진암성당 건립예정터를 지나 숲이 우거진 산길을 오르니 드디어 ‘천진암 강학당’의 터라고 쓰인 비석이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오르면 된다. 마침내 널찍한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천진암성지 창립선조묘역이다.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하느님의종 이벽(요한 세례자), 하느님의종 권철신(암브로시오), 하느님의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하느님의종 이승훈(베드로). 한국교회 창립의 주역이라 불리는 신앙선조 5위의 묘다. 한국교회의 신앙이 싹튼 곳이자, 그 주역들의 묘지가 있는 이곳은 오늘날 한국교회사 안에서도 중요한 순례지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 이곳은 성지도 아니었고, 심지어 인근에 신자들도 살지 않는 신앙의 불모지였다.

병인박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장단(長湍)에서 잡혀 순교한 손성직(베드로)의 가족이 광주 소뫼(牛山里, 지금의 퇴촌면 일대)에서 이주한 사람이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후에는 신자들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박해시기를 거치면서 신앙의 맥이 끊기고 만 것이다.

1976년 신장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변기영 몬시뇰은 천진암을 다시 교회의 순례지로 재건하고자 계획했다. 천진암성지 인근 지역에 매주 주일학교 교사를 파견하고, 선교사도 상주시키는 등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동시에 천진암성지에서 활동했던 신앙선조들을 현양하기 위해 선조들의 묘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교구는 마침내 1979년 경기도 포천에서 하느님의종 이벽의 묘를 발견했다. 그러나 당시 이벽의 묘는 훼손의 우려가 있어 이장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교구는 이장지로 천진암을 선정,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을 성역화하기로 계획했다.

이장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남수 주교는 이장사를 통해 “이벽 선생의 그 열심한 전교열을, 요한 세례자처럼 광야에서 외치던 그 모습을 본받아서, 아직도 교회로서는 황무지인 이 한국백성들 가운데, 우리도 요한 세례자 이벽 선생을 본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는 힘을 다하겠노라고, 이벽 선생의 유해 앞에서 굳은 결심을 새롭게 해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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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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