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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10박11일의 순례단, 산티아고의 길을 꿈꾸며 / 송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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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산티아고 같은 길이 없을까. 몇 년 전 디딤길팀원들은 신자들이 편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순교자의 시간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길, 그런 길을 만들고 싶었다. 수원교구의 모든 성지를 찍고 돌아오는 긴 코스, 10박11일의 코스를 설계했다. 약 300㎞가 넘었다. 참가인원은 10여 명. 도보순례길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더운 여름 날씨쯤이야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의 ‘반지의 제왕’ 원정대 수준이었다.

도보순례를 떠나던 날, 나는 35리터 배낭을 메고, 새 운동화를 신었다. 수원교구청에서 수리산성지로 가는 첫날, 오후 들어 비가 내렸고, 숙박업소를 구하기 위해 예상보다 10㎞ 정도를 더 걸었다. 첫날부터 물집이 잡혔다. 걸을수록 물집만큼 갈등도 커지기 시작했다. 발이 아프니까, 다른 사람들이 내 상황에 맞춰주길 원했다. 내가 쉬고 싶을 때, 더 걷자고 하는 사람이 나오면 야속했다. 손골성지에서는 나 때문에 팀 갈등도 생겼다. 같이 천천히 걷자는 사람, 미사시간에 맞추기 위해 더 속도를 내자는 사람, 이렇게 무리하면 완주하기 힘들다는 사람. 생각이 다 달랐다. 이쯤에서 집에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원래 순례길이 이런가.

긴 시간 걸으면 몸이 반응했다. 발가락이 약한 나는 물집이 잡히고, 관절이 좋지 않은 사람은 무릎이 아프고, 또 누구는 허리가 뻐근하다고 했다. 고관절이 아픈 사람도 있었다. 누구나 한 두 가지씩의 고통을 갖고 걷고 있었다. 나만 아픈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물집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성지순례가 아니라 지옥훈련 같았다. 결국 천진암성지로 가는 다리 위에서 울어버렸다. 그때 나를 울게 한 것은 작은 새였다. 물 위에 앉아있다 쪼르르 쪼르르 새들이 날아가는데, 물 위의 은빛햇살에 발을 적신 새들의 휴식은 얼마나 달콤할까. 저 날갯짓은 얼마나 힘들까, 이런저런 생각을 뒤척이는데 눈물이 났다. 그리고 며칠 후 원정대에서 나는 빠졌다. 홀가분할 줄 알았으나 마음이 묵직했다. 물집이 꼬들꼬들 말라갈 즈음, 내가 멈췄던 그곳에서부터 다시 걸었다. 그때 알았다. 순례길이 카펫이 깔린 것처럼 푹신하고, 멋진 풍경이 있어서 걷는 게 아니라는 것을. 걸으면 내가 보였다. 허약하고 불평 많고 이기적인 내가 보였다.




송혜숙
(클라우디아·교구 성지위원회 디딤길팀)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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