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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당 주보성인] 십자가의 성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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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리구 칠보본당의 주보성인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16세기의 교회 학자이자 위대한 신비가다.

성인은 1542년 6월 스페인의 아빌라 근교 폰티베로스에서 한 가난한 직조공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극도의 가난 속에서 성인은 메디나 델 캄포에 이주해 살았고, 17세가 된 성인은 그곳에서 일과 학업을 병행했다. 이후 성인은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고, 살라망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해 1567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성인은 당시 나태해진 가르멜 수도회의 환경과 생활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다른 수도회로 옮기고자 고민하고 있었다. 16세기는 수많은 이단과 이교가 성행해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던 시기였고, 가르멜 수도회 역시 그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런 중에 성인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을 만난다. 데레사 성인은 성인의 고민을 듣고 자신과 함께 가르멜 수도회를 쇄신해 나가자고 권유했다. 성인은 데레사 성인의 이야기에 감화돼 1568년 두루엘로에서 다른 두 회원과 함께 첫 번째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했다. 성인은 가르멜 수도회의 첫 규칙을 되살려 실천하겠다고 서약하면서 가난과 금욕, 고행을 실천하고 맨발로 다니며 관상적 수도생활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성인은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던 중 1577년 수도회 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납치돼 톨레도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됐다. 빛조차 들지 않는 방에서 9개월의 걸친 감금생활은 성인에게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성인은 이 절망의 끝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신비를 경험하게 됐다. 성인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교감하는 신비를 체험했다. 이런 신비 체험 안에서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과 같은 영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가까스로 감금에서 빠져나온 성인은 다시 여러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세워나갔고, 성인이 체험한 신비를 바탕으로 여러 영적인 시를 작성하고 해설해나갔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는 마침내 1579년 교회의 인준을 받았다. 성인은 바에사에 개혁 가르멜 수도회의 대학을 세우고 학장을 맡았다. 1582년에는 그라나다의 로스 마르티레스 수도원의 원장을, 1585년에는 안달루시아 관구의 관구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590년 다시 가르멜 수도회 안에서 분쟁이 시작됐다. 성인은 1591년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가게 됐다. 하지만 병에 걸린 성인은 그대로 스페인에 남아 우베다 수도원에서 핍박을 받다가 그해 12월 14일 선종했다.

성인은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고, 1926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됐다. 1993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인을 스페인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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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9-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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