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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비우고 채워지는 것들 / 손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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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상담 공부를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동기 초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상담세미나였습니다. 상담으로 유명하신 교수님을 모시고 10회의 세미나를 했었는데, 그 첫 시간, 교수님께서 모두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다들 여기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요?”

저는 “관계 속에서의 어려움을 마음공부를 통해 관계의 회복과 마음의 수양을 쌓고 싶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다음 제가 예상한 피드백은 “이 수업을 통해 좀 더 많은 수양을 쌓으시길 바랍니다”라는 답변이었죠.

그런데 교수님 대답은 “마음의 안정과 수양은 쌓는 게 아니라 버림과 비움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수업 첫날부터 마치 겨울 아침에 찬 얼음물로 세수한 듯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신선한 충격이었고 좋은 조언이었고 받아들일 마음이 충분히 있었던 반면 잠깐이나마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던 건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물질도 모자라 마음공부조차 더 쌓으려는 욕심이 들켜버린 것 같아 그런 것일까요?

비움의 첫 작업은 기억도 나지 않는 자신의 가장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무의식중에 박힌 어린 시절의 몇 장면들만 사진에 찍힌 장면을 보듯이 기억이 났습니다. 세미나 기간이 끝날 때쯤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사진 같은 한 장면 한 장면이 지금 나의 상처가 되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 기쁨이든 슬픔이든 쌓이면 모두 그것이 내가 넘어야 할 산입니다. 산을 깎으면 평야가 되듯 마음을 비우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우리는 수천 마일의 해외여행을 꿈꾸고 짧게는 국내 여행도 많이 가려고 하지만 정작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30㎝ 남짓 되지 않는 기나긴 여행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합니다.

대림시기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며, 태어나서 수난으로 돌아가시기까지 일생을 가난과 겸손으로 생활하셨고, 탄생조차 비움으로 오셨던 그분의 삶의 여정을 통해 우리 삶의 목적이 그분과 닮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씩 비움으로 가난과 겸손을 채우는 대림시기를 지내봅니다.





손효진
(비아·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 병리과)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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