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6) 노틀담 수녀회 (상)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19세기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 혼란이 극심했다. 대부분의 부모가 공장에 나가서 일해야 했고, 아이들은 제대로 된 돌봄을 받기 어려웠다. 종교 교육을 받을 기회도 거의 없었다.

독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848년 무렵 베스트팔렌 코스펠드(Coesfeld) 성람베르티본당 부설 초등학교 교사였던 힐리곤데 볼브링과 동료 교사 엘리사벳 쿨링은 이런 배경 속에서 가난하고 버림받는 아이들과 함께 살며 보살피는 한편 수도자로서의 삶에 지향을 두었다. 영성 지도 신부였던 본당 보좌 테오도로 엘팅 신부는 교회 내에서의 이런 사도직이 지닌 중요성을 깨닫고 이들을 수도 성소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 뮌스터교구에는 여성 교육수도회가 없었던 상황이라 엘팅 신부는 뮌스터교구장 요한 게오르그 뮐러 주교와 의논한 결과, 네덜란드 아메스포르트 노틀담 수녀회에 도움을 청했다.

1850년 6월 3일 아메스포르트 수도자들을 맞아 힐리곤데 볼브링과 엘리사벳 쿨링은 청원기를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1일에 두 사람은 마리아 알로이시아 수녀, 마리아 익나시아 수녀로 각각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에 발을 디뎠다. 이로써 코스펠드 노틀담 수녀회의 창립이 이뤄졌다.

두 수도자가 뿌린 씨앗은 점차 번성하여 확산됐고 1855년에는 아메스포르트 노틀담 수녀회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아메스트로프 노틀담 수녀회는 벨기에 나뮤르 노틀담 수녀회로부터 정신과 규칙을 이어받았던 수녀회. 그런 면에서 성녀 줄리 비야르(1751~1816)에 의해 창설된 나뮤르 노틀담 수녀회의 정신은 자연스럽게 코스펠드 노틀담 수녀회 영성의 뿌리가 됐다.

노틀담 수녀회 ‘영성의 어머니’로 불리는 성녀 줄리 비야르는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 퀴비어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스스로 동정 서원을 할 만큼 어려서부터 돈독한 신앙심을 보였다. 그러나 23세 때 신경조직이 마비되고 8년 후에는 의사의 부주의로 회복 불가능한 전신 마비 불구자가 되어 이후 30여 년을 병상에서 지냈다.

그런 시련 속에서도 신앙과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비야르 성녀는 하느님 사랑에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일생을 어린이와 부녀자 교육을 위해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1804년 수녀회를 창립했다.

같은 해 비야르는 예수 성심께 완치와 은혜를 구하는 9일 기도를 드린 뒤 병이 완치되는 기적을 체험하고 더욱 전교에 힘써 ‘걸어 다니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불렸다. 1809년에는 수도회 본원을 벨기에 나뮤르로 옮기고 평생을 신앙 전파에 헌신했다.

피로와 노환의 고통에 시달렸던 비야르는 65세 때인 1816년 선종했다. 1906년 시복됐으며 1969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결국 성녀 줄리 비야르가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 교육을 통해 세상에 드러냈고 이 정신적 유산은 아메스트로프 노틀담 수녀회를 통해 코스펠드 노틀담 수녀회 창설자들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02-0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19

갈라 5장 13절
형제 여러분,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