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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농사짓는 조각가 / 조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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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지금의 작업실과 집을 지을 때입니다. 집을 짓지 않고 농사만 짓고 계시던 옆의 땅 60대 주인 분들께서 “건축 자재를 놓을 공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선뜻 땅의 절반이나 내어 주셨습니다.

당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아 집의 완성은 더뎌졌지만,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셨고 집이 완성되고 나서는 “가족이 먹을 쌈이라도 심어보라”며 한 고랑의 땅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농사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우리는 쑥쑥 올라오는 쌈 채소들이 꼭 땅이 주는 선물 같았습니다. 다음 해에는 세 고랑, 그다음 해에는 다섯 고랑까지, ‘제법 잘한다’며 더 지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젊은 사람들이 기특해 보이셨나 봅니다.

이렇게 해를 거듭할수록 쌈 채소뿐 아니라 고추, 방울토마토, 가지, 감자 등등 심는 작물의 가지 수도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3년째 되던 봄, 여느 때 같으면 땅도 고르고 비닐도 덮어야 하는 정신없을 때임에도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한여름이 다 돼서야 갑자기 나타난 아저씨는 아주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아프신 아주머니를 위해 “좋은 거 먹이고 싶어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이젠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씀하시며 상심하는 아저씨 모습에서 부인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이젠 당분간 못 오실 것 같다며 “앞으로는 스무 고랑 모두 지어보라” 말씀하시고는 다신 안 오실 것처럼 떠나셨습니다.

한 고랑 농사 짓기도 힘들어 했는데, 스무 고랑이 넘는 땅이 되니 이제 뭔가 심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옥수수랑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신기하게 이 두 작물은 심을 때와 수확할 때만 조금 신경 쓰면 되기에 우리에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하늘이 내려주시는 비와 햇빛만으로도 충분히 자라났습니다. 첫 농사의 수확은 무심했던 우리에게 엄청난 양의 선물을 안겨줬습니다.

그렇게 그 해가 지나가고 이듬해에 옆집 아저씨에게는 다시 농사지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바로 첫 손녀를 보신 겁니다.

이제는 그 아이를 위해 농사를 지으십니다. 딱 다섯 고랑만. 그리고 나머지 열다섯 고랑은 우리에게 다 주십니다.

“당신네 집엔 늘 손님이 많으니 사람들과 나눠 먹으라고….”

아저씨는 우리와 종교가 다릅니다. 가끔 “뭐 하는 사람들이냐”며 물어보십니다. 또 집 마당에 놓여 있는 성모상을 보고 “이거 만드는 사람이냐”고 물어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냐”고도 하십니다.

지금은 딸 같이 아들 같이 생각해 주시며 아저씨 땅을 “이웃과 함께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사랑을 실천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요즘은 슬슬 농사일에 꾀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성스레 키운 고구마랑 옥수수 맛을 본 가족과 지인의 즐거워하는 얼굴을 떠올리며 오늘도 작업은 잠시 뒤로 하고 밭으로 나갑니다. 아저씨가 말씀하신 이웃사랑을 위해….




조수선 (수산나ㆍ조각가ㆍ제1대리구 용인본당)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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