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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어린 시절 기억의 한 조각 / 김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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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초봄인 듯 쌀쌀한 날씨에 몸을 잔뜩 움츠린 작은 아이는 양은대야에 빨래를 담아 그 위에 빨랫방망이까지 얹어 조심조심 언덕 아래 냇가 빨래터로 내려온다.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빨래하시며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쯧쯧, 엄마가 아파서 어린애가 고생하네….”

연상 아주머니들의 눈치를 봐가며 냇가 끝에 쪼그리고 앉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져온 빨래를 냇물에 담갔다가 시린 손을 호호 불며 방망이로 두드려가며 빨래를 한다. 한참 만에 다 빤 빨래를 대야에 담아 언덕길을 오른다. 내려올 때보다 훨씬 무거워진 빨래 무게가 버거워 안간힘을 쓰며 언덕길을 오르다가 그만 대야를 놓쳐 힘들게 빨았던 빨래는 땅바닥에 뒹굴어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 서 있던 아이는 한숨을 푹하고 쉬더니 빨래를 주워 도로 냇가로 내려와 흙 묻은 부분을 헹구며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리고는 목도리를 풀어 허리에 매고 빨랫방망이를 끼운다. 헹군 빨래를 아까보다 더 꼭 짜서 담고 간신히 대야를 머리에 이고서는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작은 걸음으로 언덕을 다시 오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꼭 다물고 씩씩하게 앞만 보며 언덕을 넘는다. 봄바람이 살랑 불어온다. 따스한 햇볕이 아이의 등 뒤를 쫓는다. 노란 개나리가 손을 흔든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아이고, 우리 장한 큰딸!” 하시며 안아주시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겨 몸을 녹인다. 슬프고 힘들었던 마음도 스르르 녹는다.

구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매일 부모님이 기도하시면 놀이하듯 옆에 앉아 따라 하곤 했다. 우리가 속삭이듯 말해도 주님께서 다 듣고 계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자주 속삭였다. 특히 어머니가 안 아팠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많이 했었다. 아이들이 잘못한 일이 있어도 주일이라 봐준다시며 주일에는 절대 벌주지 않으셨기에 ‘오 주 예수님(아버지가 생전에 부르시던 예수님의 호칭)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믿을 수 있었다.

마치 물안개가 피어오르듯 아련히 남아있는 어린 시절 기억의 한 조각에서, 미처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내 삶의 곳곳에 순간마다 스미듯 채색하시고 가꾸어 주신 분의 손길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조각은 노란 개나리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살아가면서 나에게 이 기억의 조각은 슬프거나 힘든 상처가 아니라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살며시 다가와 희망이 되어주었다. 희망이 되어주신 그 고마우신 분께 감사드리며 함께 나누고 싶다.




김애리 (엘리사벳·제2대리구 분당야탑동본당)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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