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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도미니코 수도회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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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회’라고도 하는 도미니코 수도회는 도미니코 성인(1170~1221)이 1216년 설교를 통한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설립한 탁발 수도회다.

1170년 4월 스페인 칼레루에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도미니코는 어렸을 때부터 깊은 신앙을 배우고 체험하며 성장했다. 수석 사제인 외삼촌의 도움으로 일찍이 성직자의 자질을 쌓을 수 있는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이는 그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1184년 18세에 팔렌시아(Palencia)대학에 입학한 성인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사제로 서품된다. 1203년 오스마교구장 디에고 주교와 함께 외교 사절로 북유럽 여행길에 나선 성인은 알비파(Albigenses) 이단의 위협에 직면한 교회 현실을 목격했다. 이단에 빠져있던 여관 주인과 밤새 토론하며 바른 신앙의 길로 되돌아오게 했던 성인은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성소를 깨달았다. 자신의 관상 생활로부터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 사도들과 같이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복음 전파에 주력하는 설교자들의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성인이 살았던 12~13세기 유럽은 정치·경제적으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인구 증가와 도시의 발달, 국가들 출현이 있었지만 사회는 빈곤한 상태였다. 교회는 또 내부적으로 각종 이단 단체들의 위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 십자군 전쟁으로 외부적으로는 이슬람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힘든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인은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알비파 이단의 오류를 지적하고 정통 교리를 전파했다. 교회를 수호하는 설교자 수도회 창립으로 성인은 혼란한 교회를 굳건하게 하고 이후 신항로 개척에서 선교라는 복음적 메시지에 충실하게 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는 1215년 1월 프랑스 툴루즈에서 첫 형제들의 공동체를 설립하고, 1217년 1월 ‘설교자들’ 칭호를 교황 칙서로 인가받음으로써 교회 최고 당국자 이외에는 최초로 설교 직무를 수행하게 된 수도 공동체가 됐다. 그때는 이단이나 신흥종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대였던 만큼 주교 외에 사제라 할지라도 외부에서 설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도미니코 수도회는 개인 차원이 아닌 수도공동체 차원으로 설교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는 데에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에 앞서 성인은 1206년 프랑스 프루일에서 여성들의 공동체를 세웠다. 이는 ‘도미니코 관상 수녀회’의 기초가 된다.

수도회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칙과 프레몽트레 수도회 규칙을 토대로 절대 청빈에 바탕을 두는 한편 세속 가운데 살면서 사람들의 회개와 개종을 촉구하기 위해 필요한 지역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적극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성인의 생전에 이미 급속한 발전을 이뤘고, 사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진리 수호와 설교를 통해 교회 성장에 이바지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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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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