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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믿음을 심어주신 분 / 김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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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일학년 가을 어느 날, 친구들과 그 당시 많이들 갔던 포도밭을 찾아 안양행 버스를 탔습니다. 종점에 내렸지만, 포도밭이 보이지 않아 택시를 이용했는데 그 후로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얼마가 지났는지 깨어보니 몸에는 온통 호스가 달려있었고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마침 추석 명절을 앞둔 터라 포도 상자를 가득 실은 대형트럭이 저희가 탄 택시를 들이받고 넘어져 미끄러지면서 택시가 깔린 끔찍한 사고가 났던 것입니다.

친구 중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 역시 이마에 백 여든 두 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해야 했고, 경추 골절로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한순간에 엇갈리는 생사의 운명과 그로 인한 희비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엘리사벳, 주님께서 쓰실 데가 있어 살려 주신 거야. 항상 감사드리며 살아야 한다.”

원목 수녀님의 위로 말씀에도 감사드리기보다는 친구를 잃은 슬픔과 미안함, 갑자기 뒤엉킨 현실에 대한 절망감에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이런 제 슬픔과 절망에 위로자이시며 친구가 되어주신 분이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 의지하며, 힘들 때마다 ‘주님께서 왜 나를 살려 주셨을까?’ 생각했습니다.

거부하고 부정하고 분노하고 우울한 과정을 성모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유다인 심리학자인 빅터 플랭클의 의미 요법을 접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극한 상황에서도 삶의 목표와 의미를 지녔던 유다인들은 살아남는 과정을 읽으며, 그토록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던 상실의 아픔과 이별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고통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동안 겪었던 고통의 의미를 찾아보며 제 마음에 밝은 빛이 들어옴을 느낄 수 있었고,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지라도 그 일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일을 이겨내고 승화시킬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깊어지면서 나도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조금씩 생겼습니다. 그리고 나처럼 삶의 고통을 겪으며 힘들어하는 이들을 돕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됐습니다.

이렇게 내 생의 한 조각을 들여다보니, 죽음에서 나를 살리시어 생명을 주시고 꿈을 심어주신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조각은 짙은 향기의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나에게 이 기억의 조각은 그저 아픈 상처가 아니라 그 의미를 찾아 다시 일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살며시 빛으로 다가와 믿음이 되어있었습니다. 나의 믿음이 되어주신 그 고마우신 분께 감사드리며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김애리 (엘리사벳·제2대리구 분당야탑동본당)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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