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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사랑이신 분 / 김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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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 없이 단 3분을 살 수 없지만, 그 고마움을 잊고 살 듯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바삐 살며 주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살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저 습관처럼 미사 참례하고 습관처럼 봉사하며 아프고 고통 받는 이들을 능력 되는대로 돕고 기도하고 그 정도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욕심을 내게 되었습니다. 남들과 비교도 하게 되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시어머니의 치매 병간호에 지쳐가며 가슴 타는 메마름이 느껴졌습니다. 얼룩덜룩 말라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이의 고민이라면 ‘배부르고 등 따시니 고개 쳐든 악습’이라고 충고했을 것 같아, 성경을 읽어도 문자로만 다가왔고, 악습을 끊으려고 판토하 신부님의 「칠극」을 읽어도 자꾸 책을 덮게 되어 탐욕에서 멈추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애꿎은 성모님의 치맛자락만 찢어지라 붙들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다 회사 일로 애리조나 사막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힘들어했던 시어머니 병간호에서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지내야 했던 시댁 제사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웠지만, 마치 가을 낙엽이 마르고 말라 툭 치면 금방 바스러져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 메마름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한인성당은 차로 2시간이나 걸리니 매일 갈 수가 없어 제가 살던 동네 미국 성당에서 매일 미사를 드리러 가기로 했습니다. 내 나라에서처럼 언어도 자유롭지 않았고 친구도 없으니 자연스레 미사가 끝나면 십자가 앞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내 마음 한구석 희미한 빛이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다시 빛을 밝혀야 할지, 어찌해야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생각을 하다 하다 지쳐 그저 멍하니 십자가만 바라보았습니다. 매일 매일 그렇게 바라만 보았습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고해소를 찾았습니다. 영어로 적은 고해 노트를 가지고 들어가 떠듬떠듬 읽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울면서 한참 고해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해소 문이 활짝 열리며 연세 높으신 본당 신부님께서 나오라고 손짓하셨습니다. 엉겁결에 신부님 앞으로 나온 저를 안아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God loves you! Be free, be happy!”

메말라 없어질 것 같았던 제 마음을 적시는 샘물이 흐르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예수님의 피로써만 새로 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헤매던 시절의 기억 한 조각에서 자비하신 모습으로 다가오시어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샘물인 사랑의 성사로 나에게 은총을 내려주신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조각은 무지개색이 되어 기쁨과 평화로 피어오릅니다. 이 고마우신 사랑의 주님께 감사드리며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김애리 (엘리사벳·제2대리구 분당야탑동본당)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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