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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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특집] 한국전쟁으로 희생된 교구 하느님의 종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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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교회에도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전쟁을 전후해 체포·피살·행방불명 등으로 희생된 한국인 성직자는 40명을 헤아린다. 당시 한국인 성직자가 144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약 30%에 이르는 비율이다. 그런 희생을 치렀음에도 한반도는 분단되고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희생된 근·현대 신앙의 증인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는 데지레 폴리 신부,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 앙투안 공베르 신부, 유재옥 신부 등 교구와 관련된 4명의 하느님의 종이 포함돼 있다.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교구 하느님의 종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 앙투안 공베르 (Antonie Gombert, 1875~1950) 신부

한국명 공안국(孔安國) 신부로도 알려진 공베르 신부는 1875년 4월 25일 프랑스 로데즈 교구 아베롱의 캉불라제에서 태어나 1897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1900년 6월 24일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그해 10월 9일 동생 쥘리앵 공베르(Julien Gombert) 신부와 함께 홍콩 대표부와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안성에서 한국말을 배우다가 1901년 공세리본당에서 분리된 안성 8지역에 본당 신설 책임을 맡았다.

안성본당 초대 주임신부로 사목하면서 앙투안 신부는 지역 사회 발전에도 많은 이바지를 했다. 공소 신자들을 돌보는 한편 병자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프랑스에서 가져온 포도나무 묘목을 보급했다.

1909년 안법초등학교를 세워 자비로 운영하며 지역 아동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중요한 역할로 꼽을 수 있다. 이 학교는 처음 남자아이들을 위해 시작됐으나 1912년 여자아이들을 위해 학급을 추가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일본 경찰에 쫓겨 성당 구내로 피신한 많은 안성 주민들을 보호하기도 했던 그는 31년 동안 안성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했다. 1906년 죽음을 앞둔 청년에게 대세를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안성지역 신자들 숫자는 점차 늘었고, 1922년 안성지역 신자 수는 18군데 공소에 퍼져 1600명에 이르렀다. 그러자 신자들 헌금으로 로마네스크양식의 벽돌 성당을 신축해 1922년 10월 4일 당시 서울대목구 보좌주교였던 드브레(Devred, 1877~1926) 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안성본당 사목에 이어 서울 대·소신학교 영적 지도를 맡았던 그는 1950년 7월 15일 동생 쥘리앵 공베르 신부와 함께 가르멜수녀원에서 체포됐다. 구금된 후에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평양에 호송됐다가 ‘죽음의 행진’에 동원됐다. 75세 고령으로 추위와 눈 속에 180㎞를 걸었던 공베르 신부는 피로와 영양부족 등으로 급속하게 몸이 쇠약해졌고 1950년 11월 12일 중강진에서 선종했다. 이는 증언을 통해 전해졌다.

안법학교는 2009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공베르 신부 흉상을 세워 이웃 사랑과 평화 실천을 높이 기렸으며, 안성본당은 2001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공베르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유해 송환 운동’을 전개했다. 안성지역에 펼쳤던 신앙과 지역 주민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되새기기 위한 것이었다. 또 안성문화원은 2012년 공베르 신부를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했다.

■ 유재옥 신부(1898~1950)

유재옥 신부는 1898년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왕림동에서 태어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해 철학·신학 공부를 마치고 1925년 6월 6일 사제로 서품됐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당시 교장 신부에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했고 인정이 넘치며 친절했다고 한다.

사제서품 후 개성본당 보좌로 사목 생활을 시작한 유 신부는 1927년 강원도 양양본당 2대 신부로 부임해 성당 신축 사업을 전개했고 이어서 1939년 겸이포(송림)본당 초대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겸이포본당은 사리원본당 공소였다가 제철소가 세워짐으로써 인구가 증가하자 본당으로 승격된 곳이었다. 겸이포본당에서도 유 신부는 성당을 건립해 1940년 12월 3일 라리보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고 주보를 예수성심으로 삼았다.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이었던 유 신부는 그 정신에 따라 청빈과 극기를 생활신조로 삼았고 신자들에게도 겸손·순명·인내의 생활을 가르쳤다. 겸이포본당에서는 매년 복자 성월(순교자 성월)이 되면 성당에서 만과 후 신자들에게 79위 복자전 등 한국교회 신앙 선조들의 치명 사적을 해설하며 순교 신심을 북돋웠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메리놀회 미국인 신부들과 내통해 군수공장으로 지정된 겸이포 제철소 기밀을 탐지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유 신부는 그 이듬해 본당으로 돌아왔다. 이후 옥고로 쇠약해진 몸으로도 제철소 노동자와 농촌 공소 신자들을 위해 헌신적인 사목 활동을 했다.

그는 1950년 6월 24일 6월 24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 2시까지 북한 성직자들이 일체 검거될 때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됐다. 토굴 감옥에 갇혔다가 해주 형무소로 이감됐던 유 신부는 10월 5일 동해주 백사장에 생매장 당했다.

흩어졌던 겸이포본당 신자들은 유재옥 신부가 사망한 지 25년이 되는 1975년 6월 6일 수원 서둔동성당에서 추모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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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6-23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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