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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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성월 특집] 교구 순교 선조들이 전한 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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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주문모 신부

“본심은 진실로 백성과 같이 현세에서 행복을 얻고 후세에 복을 부르고자 하는 것”


조선에 들어온 첫 선교사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1794년 12월 24일 입국해 복자 최인길(마티아)과 강완숙(골롬바) 등 신자들 집을 옮겨 다니며 비밀리에 사목 활동을 펼쳤다. 지방까지 순회하며 사목했던 주 신부는 신자들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런 지도와 신자들 열성에 조선에 온 지 6년이 지나며 신자 수는 1만 명에 달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로 주요 교회 지도자들이 연이어 체포되고 처형됐다. 주 신부는 중국으로 돌아가려했으나 조선 신자들과 운명을 같이해 순교함으로써 박해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해 4월 23일 자수했다.

의금부 심문에서 주 신부는 조선에 온 목적을 “오로지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제 본성은 진실로 백성과 같이 현세에서 행복을 얻고 후세에서 복을 부르고자 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했다.

■ 복자 손경윤 제르바시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일상의 고질병처럼”


양근성지가 현양하고 있는 복자 손경윤(제르바시오)은 1790년 복자 최필공(토마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형조에 체포됐다가 풀려나기도 했으나 열심한 신앙생활로 주문모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신자들을 위해 큰 집을 산 다음 술집으로 꾸며 밖으로는 술을 팔고 안으로는 신자들을 불러 가르치고 교리서를 베껴 나눴다.

1801년 ‘천주교 우두머리’로 밀고돼 양근(양평군 양근읍 일대), 교하(파주시 교하읍 일대), 양지(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일대) 등으로 피신하다가 가족이 체포됐다는 소식에 자수했다. 혹독한 심문에 한때 배교의 말을 했으나 형조로 이송 돼서는 굳은 신앙을 고백했다.

사형 선고를 받기 전 마지막 진술에서 그는 “일찍부터 천주교에 깊이 빠져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어려워 일상 고질병처럼 됐다”면서 “천주교 때문에 여러 번 체포된 뒤에도 나라의 금지령을 무시하고 (천주교에) 빠져 마음을 바꿀 줄 몰랐고, 신자들과 같이 모여 깊게 교리를 공부했으며, 널리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복자 조용삼 베드로

“하늘에는 두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어”


현 경기도 양근 출신인 복자 조용삼(베드로)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보잘것없는 외모로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 혼인도 어려웠던 상황에서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스승으로 삼아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1800년 체포돼 혹독한 형벌에도 배교하지 않자, 관장은 조용삼이 보는 앞에서 부친에게 매질을 가했다. 이에 조용삼은 배교 의사를 밝혀 석방됐다. 그러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만난 복자 이중배(마르티노)의 권유에 다시 신앙을 고백했다.

1801년 3월 27일 옥사한 조용삼은 죽기 전 심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에는 두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한 번 죽는 것 외에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후회하지 않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아들이자 교회 창설 주역들 스승이요 학문으로 이름을 높였던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양자였던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은 아버지와 양부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이어받았다.

1791년 신해박해로 생부 권일신이 죽임을 당하자 한동안 교회를 멀리했으나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신앙을 회복했다. 주문모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할 때 양근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1800년 6월 양근에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체포돼 양근과 경기 감영(포도청과 형조)을 오가며 심문을 받았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배교한 적도 있으나 서울 법정에서 배교를 취소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끝까지 (천주교 신앙) 후회하지 않고 그대로 깊게 믿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 복자 조숙 베드로

“이 길은 예수 마리아가 계획하신 일을 이루게 하실 목적”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복자 조숙(베드로)은 조부와 숙부가 신유박해 희생자들일 만큼 어렸을 적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주변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등한시 하다가 17세 때 복자 권천례(데레사)와 혼인하며 신앙에 눈을 떴다. 혼인날 밤 ‘함께 정절을 지키며 살자’고 권하는 말에 동의하며 신앙심이 되살아났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아내와 함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조숙은 선교사 영입 운동에도 참여하고 정하상(바오로) 성인이 북경을 오갈 때마다 필요한 준비를 맡기도 했다. 1817년 북경으로 간 정하상 성인을 기다리던 중 붙잡힌 조숙은 ‘배교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는 강요에도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감옥에서는 여러 차례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읽는 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내가 들어선 이 길은 나로 하여금 예수와 마리아가 계획하신 일을 이루게 하실 목적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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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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