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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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을 말한다] (19) 제4화 한국 교회 건축의 오늘 - 성미술과 성당건축

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움, 군더더기 덧칠해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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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한국가톨릭미술가회 모임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우리 미술가회 수호자인 이탈리아 화가 프라 안젤리코를 말씀하시면서 그가 산마르코수도원 벽에 그린 `수태고지`(受胎告知) 그림의 성모님 얼굴을 보면 화가가 자신을 한껏 낮춰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렸기에 그 성모님이 더 없이 아름답다고 하셨다. 이 프레스코 연작은 수사들이 묵상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제작됐는데 오랜 세월 많은 화가들이 정성을 쏟아 그린 성모상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그의 그림이 그렇게 감동적인 것은 그가 화가로서의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때 추기경님이 회원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신 것은 매우 적절하고도 단순명료한 설명이었다.



 
▲ 앙리 마티스가 도미니코수도회 성당에 그린 14처(그림1).
 


 
▲ 앙리 마티스가 도미니코수도회 성당에 그린 성모자상(그림2).
 
 
 교회미술, 소위 성미술품을 다루는 화가와 조각가와 공예가, 그리고 건축가들에게 프라 안젤리코의 성모님 이야기는 하나의 귀중한 가르침이다.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낮춰야 성립되는 일이다. 프라 안젤리코는 화가이기 이전에 수도자였다. 저명한 미술평론가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는 "안젤리코는 열정적으로 기도한 다음에야 그림을 그렸다. 기도 없이는 절대로 붓을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프라 안젤리코는 기도 행위로 그림을 그렸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그릴 때는 눈물을 흘렸고, 자주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렸다.

 앙리 마티스는 말년에 그가 은퇴해 살고 있던 프랑스 남부 방스(Vence)에서 도미니코수도회 수녀님들 부탁으로 개보수하는 수도회 성당에 성모자상과 14처를 그리게 됐다.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부유한 노년을 보내고 있던 그는, 그때 갑자기 자신이 그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종교화를 그려온 노(老)대가가 갑자기 십자가에 이르는 고난의 길에서 보인 예수 모습을 자기 마음대로 상상해 그린다는 것에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극심한 고통에 신음하는 예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마치 자기가 본 듯이 그린다는 일은 나름의 과장된 생각을 남들에게도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거나, 아무리 좋게 말해도 마티스 자신의 생각(상상력)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그는 14점의 예수님 그림을 단순한 몇 개의 선으로 추상화할 수밖에 없었다.(그림 1)

 그는 성모자상에서도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 얼굴을 윤곽선만으로 그렸다. 그는 십자가상 예수님과 그 아래 성모님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그림 2) 그는 자신의 예술을 종교에 양보했다. 누구든지 그 추상화된 선화(線畵)들에서 스스로, 마음대로, 각자의 예수님과 성모님을 마음속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됐고, 오늘날 방스의 도미니코수도회 성당의 성모자상과 14처 그림은 마티스의 어떤 걸작보다도 더 유명한,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위대한 화가 지오토는 `오직 자연의 제자일 뿐`이라고 불릴 만큼 철저히 사실적인 화가였다. 그는 파도바(Padova)의 스크로베니 소성당 벽면과 천장을 가득 채운 36개의 성경 장면들을 그리면서 모든 인물을 그린 다음 대부분의 프레스코 화면 배경을 파란 하늘과 푸른 색깔로 그려 자신의 하느님을 표현했다.

 성경의 이야기들 중에서도 예수의 신적(神的) 면모를 보여주는 기적 장면들을 대폭 축소하고 성모 마리아의 일생, 예수의 어린 시절과 수난을 강조해 초자연적 현상보다는 인간적 기록에 관심을 뒀다. 성경 장면을 마치 우리가 보는 듯이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그림으로 형상화하지 않고 푸른 하늘색으로 추상화했다. 그 하늘색은 파도바 지방에서 늘상 보게 되는 가장 평범한 푸른색이었다.

 건축은 본질적 구조 요소들로 이뤄진다. 4개의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건축의 기본형은 어떤 대규모 성전에서도 같다. 그 뼈대 위에 외벽을 바르고 내벽을 씌우고 그것을 디테일로 마감하는 것은 사실상 건축의 구성과 구조에서 본질이 아니다. 따라서 그 벽 위에 프레스코(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로 성화를 그려 성당 내부를 장식하는 일은 건축을 구성하는 본래적 요소가 아니다. 건축은 벽화 없이도 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그런 여분의 장식으로 벽화를 그려왔기에 그것에 식상해지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는 벽화 대신에 그림을 그린 액자를 벽에 걸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벽화보다 간편하게 그림을 바꾸거나 치울 수 있어서 좋았다.

 단순하고 명쾌한 순수성을 강조하는 현대 성당건축에서 그런 장식 그림들은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특히 `현대적`이라고 이야기되는 미니멀 시대 건축에서는 오히려 아무 장식 없는 흰 벽만이 순수한 느낌을 준다는 의미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사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흰 벽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스스로,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여백으로 남는다. 그래서 어쩌면 아시시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작은 기도방은 아무런 장식이 없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기도하기 좋은 방은 아무 장식도 없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가장 깨끗하고 가장 조용한 채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자유로운 느낌 속에서 기도하는 분위기가 보장되려면 성당 벽을 장식하는 성미술품들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종교는 하느님이 만드신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군더더기 덧칠이 되지는 않을지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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