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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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배은영 밀알회 서울지역 회장

“치우침없이 큰 사랑 널리 베푸신 분”, 결핵환자 돕던 형 김동한 신부 누구보다 존경·사랑, 시대적 아픔에 고통 받는 이들 더 돕지 못해 늘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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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 곁으로 떠난 지 2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떠났지만 그와 더불어 울고 웃었던 사람들, 그의 큰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배은영(이레나) 회장은 밀알회 활동을 계기로 김수환 추기경과 인연을 맺었다.

김 추기경은 평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형인 김동한 신부가 펼친 사랑의 모습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였다. 배 회장은 그러한 김동한 신부의 뜻과 유지를 자발적으로 실현하며 1978년부터 40여 년간 한결같이 밀알회를 위해 헌신해왔다. 그가 맨투맨으로 모은 후원회원만도 7000여 명이나 된다. 김수환 추기경도 그 후원회원 중 한 명이었다. 김 추기경은 선종한 그 달까지 단 한 달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김수환’이라는 이름으로 후원회비를 내왔다고 한다.



만남의 인연은 하느님의 섭리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듯하다.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인연도 아주 뜻밖에 맺은 김동한 신부님과의 만남으로 시작됐다.

기억의 첫 자락은 1978년이라는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냉담 중이던 두 명의 대녀가 서울로 이사를 왔다는 소식에 서울 한강본당을 찾게 됐다. 여의도본당 신자였던 터라 일부러 가지 않고는 한강본당을 찾을 일이 없었던 초행길이었다.

그날 미사를 주례하신 분은 김동한 신부님이었다. 결핵환자들을 위한 요양원 운영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른바 홍보활동을 나오신 것이었다. 순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은인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웃에 결핵으로 고생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할지 한창 고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부님께서는 흔쾌히 그 청년을 돌봐주신다 응답하셨지만, 애석하게도 청년은 요양원에 입원하기로 약속한 날 선종했다. 신부님의 배려에 감사한 나는 제2, 제3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돕기 위해 봉사하겠다는 약속을 드렸다.

그때부터 자전거를 배워 매일같이 밀알회 회원을 모집하고 회비를 걷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1978년에 시작한 후원 활동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김 추기경님은 김동한 신부님 회갑연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김 신부님은 김 추기경님의 손과 내 손을 맞잡게 하시곤 나를 밀알회 오른팔이라고 소개하셨다.

김 추기경님도 이후에 밀알회 후원회원으로 가입, 장기 후원회원이 되셨다.

내가 후원회원을 모집하고 있다는 말에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서 힘들게 회비를 걷는데 나도 후원회원이 되고 싶다”는 한마디만 하셨다. 그 이후 매달 추기경님 월급날이면, 밀알회 통장에는 ‘김수환’이라는 이름으로 10만 원씩 입금됐다.

김 추기경님은 자신은 추기경 자리에서 늘 대접받는 입장에 있는 반면, 형님 신부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전국 각지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구걸’을 하러 다니면서 ‘거지 신부’라고 손가락질 받곤 하는 모습에 늘 가슴 아파하셨다. 김 신부님은 오로지 결핵 환자들을 위해 구걸 강론을 하고 회원 모집을 위해 다니심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받거나 무관심과 냉대 속에 버려지는 현실을 견뎌내고 계셨다. 김 추기경님은 특히 김동한 신부님 선종 이후 기일이면 “형님 신부님은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사제의 삶을 살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해 부끄럽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사실 김 추기경님께서 한마디만 해주시면 밀알회가 널리 홍보되고, 후원회원도 빠른 시간에 많이 모으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김 추기경님께서는 밀알회 회원들과 함께하는 자리 이외에서는, 밀알회에 대해 별도의 홍보말씀이나 힘을 실어주는 말씀을 결코 하지 않고 중도를 지키셨다.

‘너희와 모든 것을 위하여’라는 모토처럼 만인의 추기경으로 누구 편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모습을 지니고 계셨다. 공사 구분이 너무 명확해 냉정하게 보일 만큼이었지만, 누구에게도 기울어지지 않는 성품을 실천하셨기에 우리에게 더욱 큰 사랑으로 남으셨던 듯하다.

안타깝게도 김동한 신부님께선 병고로 일찍 선종하셨다. 나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기일미사 봉헌을 위해 대구 결핵요양원과 성모당 등을 찾고 있다.

그 중 어느 해엔 김 추기경님께서 “나는 형님 임종도 못 지키고 기일에도 세 번이나 미사 참례를 빠졌는데, 이레나는 어떻게 가족보다 더 성실하게 기일을 지킬 수 있느냐, 내가 참 부끄럽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나 자신뿐 아니라 우리 집 온가족이 마치 친가족과 같이 지냈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김 추기경님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김 추기경님은 남편인 김경회 검사장(안드레아·2001년 선종)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오셨다. 추기경님은 남편과도 김동한 신부님 회갑연 자리에서 인사를 나눴다.

김 검사장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서슬 퍼런 유신 독재 시절, 검찰 간부였지만 사제와 민주 인사들, 학생 등의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해 소신 있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한다. 김 추기경님께서도 늘 올곧게 활동하는 김 검사장을 격려해주시며, 특히 억울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셨다.

특히 핍박이 연이어지던 시절, 김 추기경님께서는 억울하게 구속된 사제, 운동권 학생 등을 돕기 위해 김 검사장과 늘 의논하셨고, 비서신부님이나 수녀님도 들으시면 안 되는 중요한 말씀이라면서 침실 직통번호를 따로 알려주시고 별도로 연락하셨다.

하지만 추기경님은 결코 그릇된 일로 도와 달라 하신 적도 없으시고, 단 한 번도 ‘도와 달라’는 말씀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으셨다. 고뇌에 빠지시거나 어려운 이들의 청을 들으시면 전문가로서의 김 검사장 의견을 묻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시며 ‘참 딱하다’ 혹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 번 알아봐 줄 수 있을까’라는 정도의 말씀을 하실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상대방이 부담을 느낄 말씀은 하지 않는 분이셨다.

매일같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갖가지 청에 홀로 마음 아파해야 하는 모습이 참 안타까웠었다. 법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부탁하지 않으셨지만, 도와줄 수 없을 때는 혼자 많이 힘들어하셨다. 늘 걱정을 가득 안고 계신 분이셨다.

가까이서 뵈니 사제들을 통해서도 안팎으로 걱정거리가 많으신지 자주 밤잠을 설치신 듯한 모습이어서 안타까웠었다. 하지만 추기경님께서는 늘 기도하시며 걱정거리는 마음에 간직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추기경님을 떠올릴 때면 ‘인간적인 단점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단점’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내 기억 속 추기경님은 늘 웃는 모습이다. 그냥 평소 말씀하실 때도 추기경님은 늘 웃음 가득한 모습이었다. 단 한 번도 화를 내시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덕분에 나에게 김 추기경님은 ‘사랑의 덩어리’로 남으셨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도 할 말은 꼭 하시는 모습도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다.

남편이 선종한 후 김동한 신부님 기일미사에 참례하기



가톨릭신문  2011-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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