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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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73) 8가지 참 행복 - “내 책임이다”의 축복

‘의를 추구하는 삶’ 자체를 행복으로 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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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바꾸면 나라가 바뀐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가눌 수 없는 슬픔과 더불어 이른바 ‘대오각성’을 몰고 왔다. 여고 야고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국가개조론을 펼치고 있다. 중앙 정부와 이번에 뽑힌 지방자치단체장들이 함께 중지를 모아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 초석을 깔아주길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혁신 못지않게 의식개혁이 필요할 것이다. 전자는 마땅히 정치인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다. 그렇다면 후자는? 간단히 적시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인 사안이다.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나는 의식개혁의 결정적 매개로서 ‘말’에 주목한다. 말의 힘은 참으로 가공할만하다. 그러기에 나는 근간 「천금말씨」 말미에서 다소 과격한 신념을 피력하였다.

“뜻대로 삶이 바뀌지 않는가.

습관이, 태도가, 생각이 강퍅하게 타성에 머물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말이라도 바꿔 보라.

자신의 입술이 여태 발음해 보지 않은 새 단어를 익히게 하라.

이것 하나에만 고집스럽게 집착해 보라.

그리하면 천금말씨의 비정한 법칙이 획기적 반전을 가져오리라.”

나는 이 글이 과장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잘 기획된 말은 ‘한 사람’을 바꿀 뿐 아니라 ‘나라’까지 바꾼다. 프랑스와 영국은 고급 언어 덕에 먹고 살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으니 말이다. 말 그대로 천금(千金) ‘말씨’다.

차제에 무릇 리더들이 꼭 익혀야할 말을 소개한다. 바로 “내 책임이다”라는 말! 이 말은 “내 탓이오”라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 탓이오”가 은근히 자아비판적인 뉘앙스를 풍김에 비할 때, “내 책임이다”는 성숙한 책임감을 반영한다. ‘탓’은 개인적 잘못에 한정되는 반면, ‘책임’감의 크기는 권한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러기에 “내 탓이다”라는 표현이 평상시 개인적 대인관계에서 자성의 의미로 쓰는 말이라면, “내 책임이다”는 미래지향의 리더가 써야 할 언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사기를 당했다 치자. 그럴 때 “내 책임이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성숙한 사람이다. 왜? 최종 사인을 한 건 ‘나’이기에. 결국 “내 책임이다”라는 선언은 ‘내가 행할 수 있는 나의 지도력에 대한 긍정’이 된다. 스스로 “내 책임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의 주체성은 내가 지녔다”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셈이 된다. 이런 인식이 드는 순간, 문제가 되었던 사안에 대해 아픔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긍정적인 감정도 함께 생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사태의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서 문제를 소화하고 그 대안을 찾게 된다.

반면, “내 책임이다”라는 말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의 제어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된다. 결국, “나는 자유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하여 “쟤 때문에, 저 상사 때문에, 저 사기꾼 때문에” 하면서 남 탓에 골몰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 책임이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정의롭고 살 만한 세상이 된다.

■ 세례자 요한이 주문한 ‘의로움’

지난 호에서 ‘의로움’에 대한 관점이 구약과 신약에서 확연히 차별화됨을 보았다. 그 분수령이 되는 인물로 요셉을 조명해 봤다. 의로움과 관련하여 주목할 또 한 명의 인물이 세례자 요한이다. 그는 세례자 요한은 사제 가문에서 태어나 율법에 통달하였고 사회적 신분이 보장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광야로 나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게 그 구체적인 방법을 묻는다(루카 3,10-14 참조). 스스로 의인이었던 그는 사람들에게 ‘의롭게’사는 길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우선 ‘군중’에게는 너무 탐욕하지 말고,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이 나누어 주며 이웃을 도우라고 요구하였다.

‘세리들’에게는 “그동안 많이 뜯어먹었으니까, 그거 이제 다 돌려주고, 앞으로는 뜯어먹으면 안 돼. 받을 만큼만 받아”라는 취지로 말했다.

‘군사들’에게 한 말도 똑같은 취지의 얘기였다. 당시 징용을 받았든 어쨌든 간에 유다인이지만 로마정권을 위해 근무하는 군사들도 무력으로 어려운 백성들을 갈취하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것을 시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듯이 세례자 요한은 각자에게 맞춤으로 의의 실행을 주문하였다. 결코 거창한 거대담론이 아니라, 전부 각자의 직업과 각자의 처지, 각자의 상식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주문한 ‘의로움’과 앞에서 언급한 “내 책임이다”라는 말이 서로 일맥상통함을 본다. 둘 다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려는 자세에 방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대로 정의(正義)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정의(定義)를 내렸다고 평가받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정의 또는 의로움은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데 있어서 완전하고 항구한 의지”다. 의는 서로의 유익과 사회적 질서를 위해 각자에게 배분된 요청이다. 곧 각자에게 배당된 권리와 책임이 다 성취된 상태가 사회정의고 ‘의’라는 것이다.

내가 해야 될 몫을 지금 제대로 감당하고 있으면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 어려울 것 없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 어떻게 하는지 맨날 감시하는 게 아니라, 받은 봉급에 합당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거기에 걸맞은 수익을 올려 주었으면 나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 흡족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결국 “흡족해질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의 그리스어는 ‘코르타스테손타이’(chortasthesontai)인데, 이는 ‘배부르게 되다’, ‘충만케 되다’, ‘충족케 되다’, ‘만족하게 되다’의 뜻을 지닌다. 이 문장도 수동태형이다. 성경에서 수동태가 나오면 주어는 무조건 하느님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결국 만족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채워주신다는 의미일까? 의와 축복으로 채워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적인 경험상 즉각적인 보상이 아닌 듯하다. 지상에서 온전한 의로움이 구현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의 저 약속은, 정의가 궁극적으로 구현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행복의 순간으로 기대할 것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그 삶 자체를 보람, 기쁨, 행복으로 누리라는 권고인 셈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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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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