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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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79) 8가지 참 행복 - 지혜로 얻는 평화

진정한 평화는 주님과 함께 걷는 길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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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를 깨라고?

어느 본당에 주임신부로 있을 때의 일이다. 가정 방문을 다니다가 냉담하고 있는 한 자매를 만났다. “이제 다시 성당 좀 나오시지 그래요” 했더니 자매가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먼저 본당 신부님하고 합의 봤는데요.”

“예? 무슨 합의를 봤나요?”

“시어머니 돌아가시면 나가기로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 예. 제가 먼저 본당 신부님께 여쭤봤거든요. 시어머니께서 불교를 열심히 다시셔서 제가 성당 다니는 것을 반대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요. 그랬더니 ‘일단은 가정의 평화가 중요하니, 시어머님 돌아가시면 나오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기로 했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본인의 신앙을 접는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의 뜻일까?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당신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셨다. 여기서 ‘칼’은 ‘그리스도 신앙’과 ‘평화’가 상충할 경우 가차 없이 ‘인연’을 자르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취지의 비유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허투루 여기셨을까? 아니다. 바로 지난 호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인사말은 늘 샬롬(평화)이었고, 궁극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럼에도 ‘평화’보다 ‘칼’을 더 강조하셨던 까닭은 그리스도 신앙을 통한 구원이 그 무엇에도 앞서는 우선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저 자매가 성당에 다시 나오도록 설득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불편을 십자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대신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깜박 죽어서’ 그 시어머니의 견해를 따르라고 권했다.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틀림없이 일시적인 불화 뒤에 은근슬쩍 평화가 귀환했을 것이라 믿는다.

■ 평화의 언어로 평화의 다리를 놓자

그건 그렇고, 우리는 어떻게 이 땅에 평화를 세울 수 있을까. 근래 수년간 ‘말씨’의 힘에 주목하여 그 결론을 ‘천금말씨’라 이름 붙여 말의 지혜를 나누고 있는 나는, 여러 가지 길 가운데 ‘평화의 언어’를 우선적으로 꼽는다.

콜로라도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O. J. 하비는 ‘언어와 폭력의 상관관계’를 연구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문학 작품을 무작위로 추출해서, 작품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고 비판하는 단어의 사용 빈도를 조사해 도표화한 것이다. 그 결과, 비판적인 어휘 사용 빈도가 높을수록 그 사회의 폭력 사건도 비례해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일수록 폭력적이라는 얘기다. 그러기에 우리의 언어가 평화로운 말이 되려면 평화를 사랑하는 말들이 주변에 많이 퍼뜨려져야 한다.

우리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자상하게 평화의 언어를 가르쳐준다. 교황은 가정 평화의 비결로 “미안해요”(I am sorry) 예식을 권한다. 교수 시절 심리학을 강의하기도 했던 그의 이 제안에는 심리학적 통찰이 묻어난다. 방법은 이렇다.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 부부가 서로에게 이 말을 해주라는 것.

“오늘 뭐뭐 했던 것, 미안해요!”

“나도 오늘 본의 아니게 어쩌고저쩌고 했던 것, 미안해요!”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도 이런 말이 오고 가면 세대 간 갈등이 한결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예식이 중요할까? 바로 불편한 감정은 그날로 푸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감정 해소가 다음 날로 미뤄지고 누적되면, 그것이 심각한 가정불화의 불씨가 되기 십상이다.

기네스북에 ‘세계 최장수 부부’로 기록된 어느 영국인 부부의 증언이 교황의 권고에 힘을 보탠다. 지난 2005년 영국 BBC방송 인터넷판은 80년간의 결혼 생활을 지켜 온 영국의 애로 스미스 부부를 소개했다. 그 금슬의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아내 플로렌스가 답했다.

“나는 항상 ‘미안해’(sorry)라는 말을 하는 데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남편 퍼시도 거들었다. “나 역시 항상 ‘그래, 여보’(yes, dear)라는 말로 사과를 받아 줬지요.”

상투적인 고백 한마디라도 매일 쌓이면 사랑을 다져 준다. 사소한 배려의 말 한마디가 모여 깨지지 않는 화목을 이룬다. 물론 이 예식은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충분히 유용하다. 격렬한 회의를 마치고 서로 악수를 나누며 헤어지기, 하루의 치열한 업무 뒤에 동료들과 가볍게 회포 풀기, 시합을 끝낸 후 서로 잘했다며 나누는 포옹 등등… 우리들은 얼마든지 평화로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평화는 말로써 구축된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은 마음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설령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평소 분열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부주의한 말 한마디로 멀쩡한 평화를 깨뜨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반면 화해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인사치레 말 한마디로도 서늘한 반목의 분위기를 훈훈하게 복구시킬 수 있다. 결국 평화의 관건은 그것을 열망하는 만큼 평화의 언어를 익히느냐 아니냐다.

■ 다른 평화

오늘날 우리가 아옹다옹하면서 누리는 평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평화도 있다. 그런 평화도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1939년 유럽은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전쟁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영국과 독일은 이미 교전 중이었다. 이에 영국 왕 조지 6세는 성탄절 밤, 곤경에 처한 백성에게 짧은 라디오 연설을 했다. 불안한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기 위함이었다.

그는 당시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미니 루이스 하스킨스의 ‘시간의 문’(The Gate of Year)을 인용하여 연설을 이렇게 마쳤다.

“시간의 문에 서 있는 남자에게 나는 말했다. ‘내게 빛을 주시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안전히 걸어갈 수 있게.’ 그러자 그가 답했다. ‘어둠으로 나아가시오. 그리고 당신의 손을 하느님께 맡기시오. 그것이 당신의 빛보다 낫고, 당신이 알고 있는 길보다 더 안전할 것이오.’”

시인의 통찰은 참으로 깊고도 실제적이다. 우리 손에 들린 ‘빛’ 속에서보다 어둠 가운데 주님의 손을 잡고 있을 때가 더 안전하다! 우리의 손을 전능하신 하느님의 손에 맡기자.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확신 속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며, 그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길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평화의 사도로 불리움 받았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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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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