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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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94)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11) - 집요함의 영성으로 잡은 두 마리 토끼, 야곱

집요한 기도 인간적 겸손이 가져온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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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귀향 길

타향살이 20여 년, 이제 야곱은 삼촌 집 더부살이를 청산할 때가 되었다. 그는 귀향을 결심한다. 자신이 이렇게 자수성가한 줄 안다면 부모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는 설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귓가에 한참 잊고 있었던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내 이놈을 죽여버리리라!”

에사우의 그 불뚝 성질은 좀 누그러졌을까? 그는 내심 몹시 두려웠다. 하여 그는 형 에사우의 심경도 살피고 화해도 꾀할 겸, 먼저 선발대를 보내어 에사우에게 다음과 같은 전갈을 전하게 한다.

“동생께서 크게 성공하셨습니다. 아주 큰 부자가 되셨습니다. 안부를 물으십니다. 형님께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창세 32,5-6 참조).

이에 에사우는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마중을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마중 나오는 모양새인가? 그 소식을 듣고 야곱이 잔뜩 당황한다. “군사 400명이라! 아니 도대체 나를 반기러 오는 거야, 아니면 나를 잡으러 오는 거야?”

걱정으로 마음이 산란해진 야곱은 있는 지혜를 총동원한다. 일단 야곱은 패를 가른다. “반씩 양쪽으로 갈라라. 이쪽을 치면 이쪽이 도망가고, 저쪽을 치면 저쪽이 도망가라.”

그러고는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 화해의 지혜

야곱이 형 에사우와의 평화로운 재회를 위하여 꾀한 노력은 오늘 우리에게도 교과서적인 영감을 제공한다.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배워보자.

첫째, 야곱은 무엇보다도 먼저 집요하게 기도에 매달렸다.

야곱이 가장 먼저 취한 화해의 조치는 기도였다. 그는 축복받은 조상들의 이름을 팔며 하느님께 간청한다. “제가 라반의 집에 갈 때는 지팡이 하나 짚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자가 되도록 이끌어 주셨으니 에사우의 손에서 저를 구해 주십시오!”(창세 32,10-13 참조)

이렇게 기도하고서, 식솔 대부대를 인솔하며 귀향길 장도에 올랐지만, 에사우의 광포한 복수극에 대한 상상으로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야곱은 다른 것은 다 잃어도 ‘장자권’ 하나만은 끝까지 보장받고 싶었다. 당장 하느님이 약속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야뽁 강 나루터에 홀로 남았다. 다시 죽기 살기로 기도할 요량이었다. 야곱은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다 엉덩이뼈를 차여 다치고 만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천사를 붙들고 늘어진다.

“저에게 축복을 빌어주기 전에는 못 놓습니다!”(창세 32,27 참조)

여기서 ‘축복’은 다른 게 아니라 ‘장자권 보장’이다. 그 밖에 무엇이 더 필요했겠는가. 결국, 야곱은 축복의 약속을 받아냈다.

둘째, 인간적인 방법을 총동원했다.

야곱은 우선, 자신이 벌어놓은 모든 것을 추려 선물을 준비한다. 야곱은 인편으로 선물을 보내며 에사우에게 바치게 한다. 야곱은 고단수였다. 그는 선물이라는 시각효과에다 시차효과까지 보탰다. 즉, 한꺼번에 주는 게 아니라 1진, 2진, 3진으로 연신 나아가, 에사우의 분노를 단계적으로 완화시키는 방법을 썼다. 선물꾸러미를 가지고 가되, 매번 다음의 말을 꼭 하게 했다.

“이것들은 나리의 종 야곱의 것인데, 주인이신 에사우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야곱도 저희 뒤에 오고 있습니다”(창세 32,19).

이 이야기를 들은 에사우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의 분통이 조금씩 가라앉지 않았을까.

셋째, 자존심을 버리고 자세를 낮췄다.

화해의 대단원에 이르러 아주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된다. 야곱이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형에게 나아가서는, 자신을 ‘못난 종’이라고 거듭 낮춘다. 자식들을 형에게 다 인사시키고,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고 나서, 형 얼굴을 보고 하는 얘기가 걸작이다.

“형님 얼굴 쳐다보니 하느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창세 33,10 참조).

거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급이다. 이는 잔꾀에서 나온 임기응변이 아니었다. 지난 20여 년간 성찰과 통회를 하며 마음에 쌓아두었던 그리움의 표출이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의 진정성이 전달되었다. 마침내 형 에사우의 마음은 완전히 누그러져 야곱 일가를 환영한다. 야곱의 집요했던 화해 노력이 이윽고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 부러진 엉덩이뼈

에사우의 용서를 받아내는 데는 부러진 엉덩이뼈가 한몫 단단히 했다. 엉덩이뼈를 치신 것은 하느님의 묘수였다. 본래 엉덩이뼈는 절대 안 부러진다. 안 부러지는 것을 다치게 했다는 것은 우발적 결과가 아니라 일부러 그러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당시에는 접골원도 정형외과도 없었다. 그러니 엉덩이뼈를 심하게 다친 야곱이 형에게 갈 때 제대로 걸어갔겠는가? 거의 기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결국 형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묘책으로써 야곱을 불쌍한 꼴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파김치가 되어 걸어오는 동생 야곱을 보는 순간, 에사우는 돌연 형제애가 발동된다.

“야! 누가 그랬어? 어느 놈이 그랬어?”

“형, 형을 만나기가 두려워서, 기도하다가 이렇게 되었어. 형,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살려줘.”

“야, 야, 야! 뭘 그렇게 두려워 하냐? 내가 니 형인데. 지난 일은 잊어버려. 앞으로 잘하면 되지 뭐.”

이렇게 화해가 된다. 또한 그 결과 장자권은 야곱의 것으로 굳혀진다. 집요함의 영성으로 잡은 두 마리 토끼! 얼마나 기막힌 축복인가.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야곱이 눈물을 흘리며 바쳤던 기도는 형제간 불화로 고뇌하는 모든 이들의 소망이 아닐까.

내 생애 첫 경험, 하염없이 흐르는 이 눈물,

방울마다 감사요 줄기마다 찬미입니다.

복수심으로 이를 갈던 형의 증오가 순식간에 연민으로 바뀌다뇨.

살기(殺氣) 서늘했던 에사우의 눈빛이 돌연 동정의 시선이 되다뇨.

20여 년간의 중압, 죽음의 두려움을 찰나에 바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부러진 엉덩이뼈.

아-아, 밤낮 제 비명이었던 그것이 주님의 절묘한 한 수였다뇨.

그리하여 차라리 단념이었던 화해를 꿈처럼 이뤄주시다뇨.

물밀듯이 뇌리를 덮치는 그날 그때의 기억.

처절하게 두려운 칠흑 속에서 몸서리쳐지는 고독으로,

외골수 꿇은 무릎으로 하늘 축복만 기다리는데,

홀연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옷깃이 잡혔었지요.

생땀 진액이 줄줄인 미끄러운 손으로 사력을 다해 움켜쥐었지요.

놔라-못 놓습니다, 놔라-복을 빌어주시면, 그만 노라니깐-장자권 보장해주시면…

실랑이를 벌이는데, 엉덩이뼈가 으지직! 통증도 몰랐지요.

그 덕에, ‘이스라엘’, 하느님과 겨룬자란 명예의 이름까지 얻었지요.

옷가지로 싸매고 질질 옮긴 발걸음은 고통과 두려움의 귀로였지요.

허허, 그 고통이 그 끈질긴 존재감 ‘두려움’의 답이었다뇨.

그리하여 아슬했던 장자권을 영원히 봉인해 주시다



가톨릭신문  201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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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장 14절
제가 오묘하게 지어졌으니 당신을 찬송합니다. 당신의 조물들은 경이로울 뿐. 제 영혼이 이를 잘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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