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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 박해기 - 강제 수용소의 선교사들] (10) 12시간 노예 노동과 굶주림의 박해

공산당, 사제와 신자를 대약진운동 구실로/ 노동에 동원했고 교회 남은 재산마저 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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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개영에서 아사한 왕인생 신부

사상노동개조수용소(思想勞動改造收容所) 즉 ‘노개영(勞改營)’의 수인들에게 지독하리만치 영양이 부족한 음식이 그나마도 소량으로 주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이 음식을 먹고도 하루 12시간씩 노예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한 천주교 단체 회원의 보고에 따르면 중국 남방 연안에서는 1955년 가톨릭 신부를 반혁명 죄로 체포해 15년 동안 노개영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고 한다. 1970년도에 석방시키고도 그의 머리에는 ‘반혁명분자’라고 쓴 모자를 쓰고 다니게 했다. 그 뿐 아니라 그 신부는 다시 10년 추가형을 받아 석방되기도 했는데, 당시 노개영에서 강제 노동을 당한 신부들은 석방됐다가도 다시 노개영으로 끌려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노개영에서 굶어죽는 이들이 특히 늘어난 때는 대약진운동 시기였다.

중국 공산당은 1958년 1월부터 4월에 걸쳐 각지에서 각종 대회를 소집 주재하며, 대중적인 기술혁명, 지방공업의 건설, 대규모적인 수리건설 등에 의한 공업과 농업의 ‘대약진(大躍進)’을 부르짖은 바 있다. 당시 공산당이 내건 대약진은 사상의 대약진이자 생산의 대약진이었다. 이 대약진운동 때 신부와 목사, 신자 등은 노동에 동원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성직자로서의 사목은 불가능하게 됐다. 또 공산 정부는 대약진운동을 구실 삼아 교회의 남은 재산마저 압수해버렸다.

그러나 이 대약진운동은 기본 건설에 너무 과한 투자를 하는 통에 크게 실패하고 만다. 1959년부터 3년간 계속된 대기황도 실패에 한 몫을 했다. 당시 기근은 1998년 중공 중앙당교가 펴낸 책자에 따르면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비정상 사망과 출산 감소로 인구가 4,000여만 명이 줄어들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20세기 최대의 비극이기도 했다.

게다가 대약진운동은 애국교회까지도 대폭 축소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노개영 수인들에 대한 배식이 더욱 줄어드는 결과가 이어졌다. 노개영의 수인들은 당시 매우 참담했던 실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뒀다.

“우리는 줄곧 기아선상에서 살고 있다. 영양이 부족한데 노동은 너무나 과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사망하였다. 수인들이 일하다가 사망하고, 혹은 밤에 자다가 죽석(竹蓆) 위에서 사망하였다.”

대약진운동 당시 노개영의 수인들은 영양실조 상태에서 주야로 심한 노예노동에 시달려, 얼굴이 누렇게 뜨며 수척해져 일터에서 혹은 자다가도 죽어나갔다.

서주(徐州)교구 신부들도 여러 명 노개영에서 아사했다. 교구 대신학생 정우량(程友良)의 경우 일하던 도중 죽음을 맞아 주변 사람들이 땅을 조금 파 그의 시신을 매장했으나, 강풍으로 유해가 흩어지는 참담함도 겪어야 했다. 왕인생(王仁生) 신부는 온 몸에 부종이 난 채 노개영에서 굶어 죽었다. 이밖에도 산두(汕頭)교구 유약항(劉若恒) 신부를 비롯한 전국 각 교구 신부 수십 명이 노개영에서 영양실조와 노동에 시달리다 굶주려 쓰러지는 사례가 계속 이어졌다.

서양자 수녀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만 유학을 거쳐 현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전관구에 소속돼 있다. 저서로는 「중국천주교순교사」,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등이 있다.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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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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