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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 박해기 - 강제 수용소의 선교사들] (20) 한국인 사제도 노개영에서 강제노동

김선영 신부, 하얼빈서 교포사목 하던 중/ 애국교회 거부해 15년형 노개형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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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영 신부가 노개영에서 사용하던 장갑.
 
중국은 원래 도로가 발달되지 않았으며 길이 좁고 그나마 비가 오면 수렁이 되곤 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 된 후, 당국은 대대적으로 도로 포장 공사와 확장 공사를 실시해 티베트까지 도로를 정비하고 네팔이나 인도까지 도로를 이어갔다. 그런데 이 공사는 노개영의 수인들을 투입시켜 인해전술식으로 진행됐다. 우선 채석장에서 돌을 캐는 일부터 아스팔트 포장용 돌을 쇠망치로 깨고 어깨에 져서 운반하는 모든 과정에 노개영 수인들이 강제 동원됐다. 왕인생·주수덕·부학주 신부 등도 황산(黃山)에서 도로 공사를 하고, 장강 변에 있는 채석장 노개영에서 도로 포장용 돌을 캐는 일을 했다.

하얼빈은 중국의 10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 안중근 의사가 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인 김선영(金善永) 신부는 이 하얼빈에서 교포사목을 하던 중, 애국교회에 들어가지 않고 교황청과의 단절을 거부해 1952년 체포, 15년 노개형을 받았다. 그는 흑룡강성 염가강 감옥에도 잠시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과실 재배를 하고 양어장과 양계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이후 김선영 신부는 하얼빈 근처 평산으로 끌려갔는데, 그는 이곳에서 자주색 옷에 자주색 모자를 쓰고 쇠망치로 도로 포장용 돌을 깨는 일을 15년 동안 해야 했다. 수인들의 강제노동은 하루 책임량도 정해져 있었으며, 돌을 깨는 일보다 이 돌을 정해진 장소에 운반하는 일은 더욱 고역이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돌을 깨는 노동을 했던 신부의 손은 늘 트고 갈라져서 피가 났다. 이처럼 힘든 노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식사는 멀건 수수죽 한 공기씩이었다.

한국인 임복만(任福萬) 신부는 1954년 9월 7일 체포돼 1년간 구류소에 있다가 5년 노개형을 받고 도로 포장용 돌을 쇠망치로 깼다고 한다. 임복만 신부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8년간의 감옥생활을 하면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정신상으로는 아주 기쁘고 성스럽게 보냈다.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나 너희들을 도우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에 예수께서 짊어진 무거운 십자가가 내 마음에 무량(無量)한 위안을 안겨 주었다. 내 고통이 아무리 큰들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의 고통에 비길 수 있으랴!”

임복만 신부의 형기가 1962년 9월 만료되자 노개대(勞改隊) 관교원은 하얼빈 신부들이 애국교회에 들어간 신문기사를 임 신부에게 보이면서 애국교회에 들어가겠느냐고 질문하고, 임 신부가 거절하자 3년 추가형이 내린 통지서를 가져와서 손도장을 찍게 했다. 임 신부는 석방되자마자 다시 체포돼 북만주 눈강 국영농장 노개영으로 가게 됐다.

김선영 신부도 1967년 노개형을 마쳤으나 역시 애국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해 다시 노개형을 받고, 북만주 북안 인용하 국영농장 노개영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서양자 수녀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대만 유학을 거쳐 현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대전관구에 소속돼 있다. 저서로는 「중국천주교순교사」, 「청나라 궁중의 서양 선교사들」 등이 있다.


서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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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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