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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124위 열전 <37> 윤지헌 프란치스코

조선 교회 밀사 천거와 서양 선교사 요청 주범 지목, 능지처참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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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윤지헌

‘능지처참’(陵遲處斬)이라는 형벌이 있다. 죄인을 죽인 뒤 시신의 머리와 팔ㆍ다리를 차례로 베어 여섯 부분으로 자르고 전국 각지에 보내 백성에게 보여줌으로써 경계로 삼도록 하는 극형 중 극형이다. 우리나라에선 고려 공민왕 때 시작돼 1894년에 폐지되기까지 520여 년간 시행됐는데, 124위 중에도 능지처참형을 당한 순교자가 2위 있다.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이다.

이들에게 왜 능지처참이라는 잔혹한 형벌이 집행됐는지는 이들의 결안, 곧 사형 선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유항검은 대역부도죄였고, 윤지헌은 모역동참죄였다. 오늘날 형법상 내란죄나 내란음모죄에 해당하는 대역죄였던 것이다. 유항검은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선박을 조선에 파견해주도록 요청한 계획에 연루돼 처형됐고, 윤지헌 또한 교회 밀사들이 베이징을 왕래한 사건에 연결돼 죽었다. 순교일도 두 순교자 모두 같은 날인 1801년 10월 24일이었다. 이들에 이어 처형되는 인물이 그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으로, 그 역시 ‘궁흉극악대역부도죄’라는 죄목으로 두 순교자가 처형된 뒤 12일 뒤인 11월 5일에 능지처참됐다.

1791년 신해박해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의 동생인 윤지헌은 1764년 전주부 양양소면(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태어나 아버지 윤경을 따라 전라도 진산군 장구동(현 충남 금산군 복수면)으로 이주해 성장했다. 집안은 해남윤씨 명문가로, 그는 고산 윤선도의 5대손이었다. 1794년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하면서 인척에게서 서학 서적을 얻게 된 그는 오랫동안 이 책을 탐독한 끝에 신앙을 받아들이고 형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그러고나서 1787년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그랬기에 그의 신앙은 탄탄했고, 교회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신해박해로 형이 순교하자 더는 고향에서 살 수가 없게 된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고산현 운동면(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숯고개길)으로 이주, 교회서적을 베껴 읽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을 열심히 가르쳐 입교시키곤 했다. 또한 1795년에는 운동면을 찾은 주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고, 조선 교회의 밀사로 황심(토마스)을 천거한 뒤 베이징에 파견하는 일에 동참했다.(이기경의 「벽위편」 제3권 참조). 그는 1800년 봄,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강완숙(골룸바)의 집에서 주 신부를 만났고, 그해 11월에 다시 상경해 고종사촌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또 다시 주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된 윤지헌은 전주감영에 갇혀 있다가 갖은 문초을 받던 중 황심을 교회밀사로 천거한 일과 서양 선교사를 실은 선박을 파견해 주도록 요청한 이른바 ‘대박청래’(大舶請來) 사실을 전라감사에게 자백한다. 물론 이우경의 자백에 따라 드러난 대박청래나 교회 밀사 파견 같은 이미 공개된 사안 외에는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당시 윤지헌의 신앙 고백은 「사학징의」 제1권을 통해 전해온다.

“마치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습니다.”

국사범으로 몰린 그는 유항검과 함께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됐고, 포도청과 형조를 오가며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그는 마지막으로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은 뒤 자신의 결안에 서명하고, 다시 거주지인 전주부로 이송돼 풍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현 관아에 잡혀 있던 부인 유종항은 종이 돼 흑산도에 유배됐고, 아들 종원과 종근, 종득은 각각 제주도와 경상도 거제도, 전라도 해남현에, 딸 영일과 성애는 각각 함경도 경흥군과 평안도 벽동군에 노비로 유배됐다.

죽은 뒤 시신을 남기지 못하고 묻힐 곳조차 없던 순교자 윤지헌. 하지만 순교 뒤에는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로 이어진 그의 깊은 믿음살이는 우리네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영원한 삶의 보화란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전해준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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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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