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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육과 의료로 제주 일으킨 여성 선구자 최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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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누구를 위해 등불을 밝힙니까

▲ 서울 유학 시절의 제주 친구들 (맨 왼쪽).

민족차별주의자 정숙은 1915년 10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아 서울 유학길에 들어섰다. 그만큼 정숙의 각오는 비장했다. 제주의 외딴곳에서 순진하게 지내던 태도를 완전히 벗어버려야 했다. 두려웠다. 그러나 두려움의 다른 이름은 용기라고 했던가. 두려운 만큼 맹렬하게 투지가 타올랐다. 그런데 수업 첫날 정숙은 절망했다. 일본어 자체가 처음인데 모든 교과목이 일본어였다. 일본어가 국어이고 일본 역사를 외워 시험을 보았다. 교사들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학생 누구나 겪는 일이 아닌 정숙만의 어려움이고 돌파해야 할 첫 관문이었다. 정숙이 공부하려면 무엇보다 일본어를 알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명동성당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정숙에게 숙소를 제공한 것이었다. 내 집처럼 편안했다. 정숙은 밤새워 공부하고 수녀들과 새벽 미사를 드리고 학교에 갔다. 저녁이면 다시 수녀들과 시간 전례를 바치고 밤새워 공부했다. 드디어 정숙은 편입한 지 두 달 만에 2등을 거머쥐었다.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도 깜짝 놀랐다. 모두 정숙의 비범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정숙은 그로부터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3학년이 되자 정숙은 급장을 맡았다. 공부도 잘하지만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매사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처리하여 학생들은 정숙을 믿고 좋아했다. 어느 날 일본인 여교사가 불우한 조선 학생의 수업료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일본인 교사들은 여교사를 따돌리고 전근까지 보내려 했다. 정숙은 스승이 제자를 도운 일이 왜 잘못이고 일본인이 조선인 제자를 안타까워하면 왜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배움의 터인 학교에 차별이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숙은 학생들에게 여교사를 지지하는 뜻으로 수업 거부를 도모하고 학생 대표 자격으로 조선인 엄순원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 당시 교장보다 실세였던 일본인 부교장은 정숙을 괘씸하고 당돌하게 보아 퇴학조치를 했다. 그러나 정숙을 아끼던 교장은 부교장을 설득하여 반성문을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정숙은 부교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한 달간 반성문을 써야 했다. 정숙은 민족 차별의 잔인함과 비애를 뼛속 깊이 실감하고 이를 악물며 가슴에 새겨놓았다. 얼마 후 교장의 조카이자 고종의 아들인 이은 왕세자가 일본에서 잠시 귀국하여 진명여고보를 방문하게 되었다. 학생 대표인 정숙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는 비운의 이은 왕세자에게 백성들이 얼마나 왕세자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지 애틋한 마음을 담아 환영사를 읽어 나갔다. 왕세자와 교장은 크게 감동하였다. 학생들과 교사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 강평국과 타자 연습하는 정숙(왼쪽). 79결사대 정숙은 진명을 졸업하고 곧바로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하였다. 단짝 평국과 수선도 경성여고보 사범과에 함께 진학해 드디어 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경성사범에는 민족차별주의자들이 진명여고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정숙은 그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정숙은 더 강해졌고 뜻이 통하는 친구들이 함께 있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승하하였다. 경복궁 대한문 앞은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통곡 소리로 가득했다. 독살설도 나돌았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사람인 박희도 선생이 의식 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79결사대를 조직했는데 경성사범 사범과 최정숙 강평국 본과 최은희가 주축이었다. 79결사대는 고종의 승하를 조문하기 위해 검정 통치마를 잘라 까만 댕기와 조표를 만들어 조선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대한문으로 나가 엎드려 통곡하였다. 2월 28일 정숙과 평국과 최은희는 박희도 선생의 집으로 갔다. 다음 날인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학생들을 이끌고 나오라고 했다. 세 사람은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고 학교로 돌아왔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학생들 모두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이 사실을 입수한 일본인 교사들이 교문을 잠그고 학생들을 가두었다. 속절없이 애만 태우던 학생들은 멀리서 만세 소리가 들려오자 흥분을 참지 못하고 기숙사 창고로 달려갔다. 도끼와 연장을 꺼내와 교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교문이 열리자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으로 내달렸다. 정숙과 평국도 달려나갔다. 정숙은 너무 기뻐 목청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일본 기마병들이 순식간에 나타나 총을 쏘며 학생들을 짓밟았다. 무자비한 구타와 말발굽에 밀려 정숙과 평국은 흩어졌다. 정숙은 군중 속으로 들어가 만세를 부르며 진고개를 넘고 있었다. 느닷없이 정숙의 머리채가 일본군의 손에 휘감겼다. 일본군은 사정없이 정숙의 뺨을 거푸 후려치고 군화로 짓밟았다. 이어 머리채를 잡고 남산 정무총감부까지 질질 끌고 갔다. 옷이 찢어지고 살이 쓸려 피가 흘렀다. 총감부에 32명의 학생이 잡혀 와 있었다. 교장이 달려와 일본군에게 사정하자 주모자로 추정되는 정숙과 은희만 남기고 모두 풀려났다. 정숙은 한낱 짐승처럼 고문실에 내동댕이쳐졌다. 연락책과 주모자를 대라며 고문이 시작되었다. 거꾸로 매달아 코에 물을 부었다. 손가락 사이에 쇠막대를 끼워 비틀었다. 정숙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린시절 이 곤자가 수녀에게서 들었던 순교자들이 떠올랐다. 이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과 함께 기도가 흘러나왔다. 고문은 더 악랄해지고 정숙의 정신은 성모님께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본군은 정숙에게 옆방의 최은희가 다 불었으니 너도 이제 다 불으라고 유인했다. 정숙은 은희가 말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설령 고문에 못 이겨 은희가 불었다 해도 일본군 따위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고문당하다 죽는 일이 있어도. 제주의 어머니가 정숙이 독립운동하다 잡혀 옥살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제주도도 일본군의 만행이 지독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다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2632 만신창이가 된 정숙은 총감부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죄수 번호 2632를 가슴에 달았다. 막상 감옥에 갇히고 죄수복을 입자 정숙은 뭐 하나 이루지도 못하고 죽게 생겼구나 하고 절망했다. 감옥 문이 열리고 은희가 들어왔다. 은희가 다 불었다는 일본군의 말은 거짓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서러움이 복받쳐 손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정숙과 은희는 자신들 말고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잡혀 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다며 힘을 내 꼭 살아 돌아가자고 서로 격려했다. 서대문형무소는 지옥이었다. 매질 소리와 비명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지 보름쯤 지나자 형무소장이 정숙을 불렀다.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장을 받게 해줄 터이니 너그러운 일본 천황께 감사하고 충성하라고 말했다. 정숙은 풀려났다. 정숙은 선심 쓰듯 말하는 소장이 얄밉고 비위가 상했다. 이 모두가 민족의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자 석방의 후련함도 잊고 그저 분하기만 했다. 안타깝게도 은희는 석방되지 못했다. 학교에 돌아오자 평국과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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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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