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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최양업 신부] (23) 3년간의 사목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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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고속도로 진천 IC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백곡저수지를 거쳐 구수 삼거리에서 안성 방향으로 서운산 자락을 타고 약 7㎞를 가다 보면 왼편에 배티성지가 나온다. 도로명 주소로는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이다.

배티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다. 아울러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교구장이 설립한 첫 번째 공식 신학교가 자리했던 곳이다. 충청도, 특히 오늘날 충북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경기도 양근의 권철신(암브로시오)일가에 의해서다. 이국승(바오로)과 이기연 등이 권철신ㆍ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한 후 충주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배티 교우촌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기도와 내포 지방 그리고 경상도 일원에서 피신한 신자들에 의해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후기까지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던 오지인 데다 충청남북도와 경기도의 접경이어서 박해를 피해 떠돌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지내기에는 딱 좋았다. 모방 신부는 1837년 5월 배티에 공소를 설립했다. 당시 밀사로 활동하던 김 프란치스코의 집이 배티에 있어서 모방 신부가 이곳을 사목 거점으로 삼은 듯하다.

배티가 한국 천주교회사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850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신학교를 공식 설립하면서부터다. 페레올 주교는 유학 준비를 위한 소신학교를 설립하고 그 책임을 다블뤼 신부에게 맡겼다. 다블뤼 신부는 손골과 배티 교우촌에 여름과 겨울용 신학교를 운영했다. 그는 1850년 9월 이전께 배티에 집 한 채를 마련했다. 방 두 칸짜리 큰 집이었는데 성당과 신학교로 이용했다. 그러다 다블뤼 신부는 1851년 11월 신학교 전담 신부로 임명되면서 배티에 정주했다. 그는 배티 교우촌에서 신학생들과 교우들과 함께 산을 개간해 채소를 가꾸고, 조와 담배 등을 수확해 신학교를 운영했다. 하지만 다블뤼 신부는 1852년 페레올 주교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자 배티에서만 머물 수 없었다. 주교를 대신해 서울과 경기도 일원을 사목 방문해야 했다. 그는 1853년 2월 3일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그해 여름에는 배티 신학교를 다른 사목자에게 맡기고 사목 여행을 떠났다. 그 다른 사목자가 바로 최양업 신부이다.

다블뤼 신부가 배티신학교를 떠난 표면적 이유는 페레올 주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소신학생들의 유학을 반대한 것에 대한 문책이 있었다. 페레올 주교의 선종으로 조선대목구 선임 사제가 된 메스트르 신부(1852년 8월 입국)가 새 주교 임명 전까지 조선 교회의 장상(1853년 2월~1856년 3월)으로 활동했다. 그는 국제 신학교가 있는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소신학생들을 유학 보내려 했으나 교장인 다블뤼 신부가 이를 말렸다. 다블뤼 신부는 조선에서 사목할 조선인 사제들이 선비들과 접촉해야 하므로 선교사들과 달리 반드시 한문을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인 사제들이 존경받고 신뢰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선 반드시 한문 교육이 필요하며, 한문 교육이 소홀할 수밖에 없는 페낭 신학교로의 유학을 반대했다.

이러한 일로 다블뤼 신부는 배티 신학교 책임자 직을 내려놓게 됐고 최양업 신부가 후임으로 1853년 여름부터 신학생들을 지도했다. 최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의 뜻에 따라 페낭으로 보낼 세 명의 유학생을 선발했다. 이만돌(바울리노)과 임 빈첸시오는 다블뤼 신부가 선발해 가르치던 신학생들이었다. 나머지 한 명인 김 요한 사도는 최 신부가 선발했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백심(암브로시오)의 3남으로 잔재주가 많았으나 성격이 불안정했다. 세 명의 유학생들은 1854년 3월 성주간 때 장수 신부가 타고 온 배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는 홍콩으로 건너간 후 1855년 6월 12일 페낭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들이 최양업 신부가 유학을 보낸 ‘페낭신학교 조선인 신학생 1기’다. 이들은 모두 사제가 되지 못했다. 이만돌은 페낭에서 풍토병을 얻어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요양하던 중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을 만나 그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김 요한 사도는 1863년 귀국한 뒤 1868년에 순교했다.

최양업 신부는 1856년 여름까지 약 3년간 배티를 중심으로 사목했다. 하지만 최 신부는 여전히 전국 5개 도를 돌아다니며 사목해야만 했다. 1855년까지 최 신부가 입교시킨 성인 세례자 수가 전국 영세자 수의 45였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1856년 3월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ㆍ프티니콜라 신부 등이 함께 입국하면서 조선 교회 사제 수가 6명으로 늘어났다. 사목 관할지가 다소 축소됐지만, 최양업 신부는 1858년에도 전국 5개 도에 흩어져 있는 100개가 넘는 교우촌을 맡아 사목했다. 최 신부는 여전히 매해 10월께부터 이듬해 6월까지 8개월간 7000리, 2750여 ㎞를 걸으며 땀의 순교자의 길도 함께 걸었다.

글ㆍ사진=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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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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