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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신앙체험수기]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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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의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물론 마음뿐이지만요.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의 매 순간 연속된 시간 속에서 부단히 배워야 한다는 전제가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목표를 명백히 제시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삶의 시간이 누군가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자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라는 점에서 인간 본연의 자유로운 영혼에 부합돼 보입니다. 또한 ‘얼마간’이라는 표현이 무한히 주어진 시간이 아니기에 소중히 사용해야 하며, ‘주어진’ 이라는 말에서 내가 스스로 노력으로 갖게 된 것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조건 없이 주어진 시간이라는 점에서 겸손되이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보다 더 삶의 이유를, 존재의 의미를 명쾌하고 아름답게 정의해 주는 완벽한 문구는 아직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항상 가슴에 담고 있었지만 요즘 이 문구가 더 아름답게 가슴에 새겨지며 내게 새로운 내적 충동을 가져다주는 것은 계절 탓일까요? 계절이 가을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피부로 느낄 만큼…. 가을 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선선한 바람, 황금빛 들녘, 해 질 녘 노을, 햇빛에 반사되는 맑은 은빛 강물, 단풍과 은행으로 물든 형형색색의 가을 산,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그 바탕에 물감으로 점찍듯이 수놓은 주렁주렁 매달린 주황빛 감들…. 상상만 해도 가슴설레는….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위대한 자연의 기막힌 선물들. 눈길 돌리면 어느 것 하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린 때론 더 중요한 것을, 더 아름다운 것을 간과하곤 합니다.

 

- 이야기 하나 -

저의 전공과목이 류마티스내과이다 보니 제게 오는 환자분들은 대부분 ‘단골’입니다. 완치가 잘 안 되는 질환을 다루다 보니 한번 고객(?)은 평생 고객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환자분들 중에는 속된말로 ‘까칠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만성 통증을 안고 살아가며 대부분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고 치료비 부담이 만만치 않아 치료비 마련을 위해 다시 고된 일을 하다 보니 통증이 심해지는 악순환 속에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하루에도 그런 수많은 환자와 마주해야 하는 저에게는 어느덧 좋지 않은 습관이 생겼습니다. 매일 짧은 진료시간에 수많은 환자와 씨름해야 하므로 원활한 진료를 위해 나를 힘들게 하는 ‘진상’ 환자분들의 성격 특성을 나만이 알 수 있는 영문 머리글자로 챠트에 미리 표시해 두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진료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느 때와 같이 그날도 방문 때마다 저를 힘들게 했던 진상 할아버지 환자분의 성함이 대기자 명단에 오르자 긴장을 하고 앞선 환자분 진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료실 밖 대기실에서 그 할아버지의 불평 섞인 얘기들이 점점 커지더니 고함으로 변하고 말리던 간호사에게는 욕설하는 등 앞선 환자의 진료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난동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유인즉슨, 이전 방문 때 무릎관절 주사치료에도 불구하고 증상은 더 악화가 되고 아파죽겠는데 빨리 봐주지 않는다며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이해하려고도 하였지만 이미 수십 명의 환자와 힘겨운 씨름을 하고 맥이 풀려있는 순간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저도 발끈하여 “할아버지 난동 부리시지 말고 불만이 있으면 조용히 저와 얘기합시다” 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습니다. 제 말에 더 분노하셨는지 온갖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며 “다시는 이 병원에 오지 않겠다”느니 “의료사고로 고소하겠다”느니 하며 떠나가셨습니다.

순간 제 생각에는 솔직한 심정으로 다시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다른 병원 가서도 별 차도 없이 똑같이 고생하고 다시 아쉬워 저를 찾아왔으면 하는 아주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습니다. 언짢은 기분으로 나머지 예약된 환자들을 기계적으로 대하며 진료를 마친 제 마음도 물론 편할 리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바쁜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우연히 문이 반쯤 열린 아파트 관리실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서민아파트여서 그런지 다른 일반 아파트 경비실보다도 비좁은 3~4평 남짓한 공간에 오래된 TV 한 대와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작은 휴대용 침대 위에 누추한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빛바랜 옷을 입은 70대 정도의 연로해 보이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때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무릎이 불편하신지 약간 다리를 절고 계셨습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요즘 보기도 힘든 노란 양철로 된 도시락에 찬밥과 반찬이라곤 두어가지. 소박한 도시락! 어느 할머니가 아니 평생을 같이 살아온 늙은 아내가 싸주었을 그 소중한 도시락! 그 순간 정성껏 도시락을 싸고 있는 어느 소박한 할머니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 도시락을 보니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더 가까이 가서 보니 깜짝 놀란 것은 그 경비실의 주인공은 오늘 병원에서 난동을 부렸던 제 환자분이었습니다. 아마도 최근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하시더니 새로운 직장을 구하셨나 봅니다. 저는 멈춰 서서 약간 거리를 두고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소중한 도시락을 말없이 드시고 있는 모습은 오전에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던 심술궂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표정은 여유로웠고 평화롭고 너그러워 보였으며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도 있었습니다.

저는 오전 병원에서 화를 냈던 일이 생각이 나 부끄러운 한편 조금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안쓰럽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는 것이 내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습니다.

왜였을까? 그처럼 왠지 모를 감성을 자극했던 이유는? 아마도 소박함의 위대함 때문일 것입니다. 세련되고 화려함만을 강조하는 우리들의 삶에 경종을 울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나지 않게 묵묵히 소박함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 그림=문채현
 

아픈 몸을 이끌고 가족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거룩하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한 끼 식사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띨 수 있는 그 넉넉한 여유가 진정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의 참모습이 아닐까요? 오전 일이 마음에 걸려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집으로 발길을 재촉했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할아버지께서 오히려 커피 한 잔 사서 방문하셨습니다. 꽤 비싼 유명 커피를 가지고…. 그때 일은 미안했다고…. 그 여유로운 미소로 저를 다시 한 번 부끄럽게 하셨답니다. 그 미소는 하느님께서 저에게 내려준 첫 번째 가을 선물이었습니다.


 

-이야기 둘-

전공의 시절, 지방의 한 병원에 파견 나가서 일하고 있을 때 일입니다. 계절이 무르익어 가던 아마도 이때쯤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밤 10시 아픈 몸을 이끌고 거의 죽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목발에 의지하여 홀로 응급실을 방문하신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며칠 전 낙상한 다리의 심한 통증으로 버티다 못해 방문하셨는데, 가족이라곤 단둘, 할아버지 역시 거동이 불편하신 모양인지 보호자가 없었습니다.

적절한 처치를 마치고 나니 이젠 귀가가 걱정입니다. 할머니는 콜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이지만 상황으로 봐선 혼자 보내드리기가 여간 불안해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간호사도 원무과 직원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보호자임을 자청하고 들어온 젊은 부부가 막 병원에 도착합니다. 알아본즉슨 그분들은 사실 친보호자가 아니라 옆집에 사는 이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홀로 병원 가신 것을 뒤늦게 알고 바로 뒤따라오신 것입니다. 그 젊은 부부의 훈훈한 마음씨…. 그래서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들 얘기하나 봅니다. 잊혀 가던 희미한 기억이 문득 다시 살아나 가슴 벅차게 했던 것은 첫 번째 이야기의 할아버지가 덤으로 준 두 번째 가을 선물이었습니다. 가슴 따뜻한 이웃들의 감동의 마음 선물을 말입니다.

 

별로 특별할 것도 극적이지도 않은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라는 가슴 떨리는 고백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계절과 더불어 잔잔하게 불러일으켰습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귀를 기울이면 발견할 수 있었던 일상 속에 이웃들의 그 아름다움들을 왜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갔을까? 나에게 위로를 바라는 아픈 이들에게서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바라며 살지는 않았는지?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으려고만 하지는 않았는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유명한 재벌 총수의 “당신 해봤어? 해보고 이야기해?”라는 유명한 일화는 사랑을 배워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내보다는 핑계가 많아져 가는 나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너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봤어? 참아봤어? 해보고 얘기해!” 하고 말입니다.

오늘 진료 중 문득 내 챠트에 기록된 환자들에 대한 나만의 암호로 된 부정적인 언어들이 왠지 크게 눈에 띄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환자에게 내 편의를 위해 너무 좋지 않은 이름을 많이 붙여놓았던 것 같습니다. 생각의 산물이 언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역으로 언어가 생각을 지배하고 국한해 버리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없을지라도 친절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라고 얘기들 합니다. 하물며 나쁜 언어는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요? 환자들의 아픔마저 나의 편협한 기준으로 구획 지어 재단하려 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봅니다. 내 챠트에 기록된 선입견으로 가득 찬 부끄러운 표현들을 당장 지워 버려야겠습니다. 그래야 주님께서도 제 인생의 허물들을 깨끗이 지워주시겠죠?

▲ 그림=문채현

지난 주말 깊어가는 가을, 지리산 자락의 조용한 외딴 마을을 지나치다 낙엽들로 둘러싸인 우체국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말 그대로 노래의 제목처럼 ‘가을 우체국’이었습니다. 우체국 옆 은행나무 아래 먼지 쌓여 외롭게 서 있는 우체통 하나가 눈에 띕니다. 지금은 전자우편들로 인하여 거의 사용되지 않겠지만, 과거엔 얼마나 많은 사연을 담고 있었을까요? 누군가의 기다림과 누군가의 애절함과 누군가의 설렘과 누군가의 사랑을 모두 보듬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가을 우체국은 요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도 노란 은행 향기 가득한 사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저의 의사 생활 기간이 늘어나면서 제 이름으로 발행된 사망진단서도 늘어갑니다. 한때 수년간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수많은 환자분 중 이제는 오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니 올 수 없는 분들이 많아져 갑니다. 문득 그 환자분들의 엷은 미소와 불평, 불만, 하소연까지도 눈에 선합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하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이 가을 저를 찾아온 수많은 분의 애환을 넉넉한 여유로 보듬어 안아 사랑의 향기를 낼 수 있는 작은 가을 우체통이기를 간구해 봅니다.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 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위로가 되는 가을우체국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처럼 “나는 하느님의 몽땅 연필”이 되는 은총을 염치없이 청해 봅니다. 한해 한해 지날수록 이기심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사랑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야 하는데. 그 반대로 사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자꾸 나의 정체성을 나를 둘러싼 외적인 것들 재물, 명예, 능력 등에 의존하며 살아가지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병원 연구실 앞 공터에 나와 잠시 눈을 감고 계절을 느껴봅니다. 그윽한 달빛, 살갗에 닿는 선선하고 촉촉한 바람, 귀뚜라미 소리, 순수한 별빛 그 분위기 속에 향기로 가득한 소박한 이들의 소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매우 조화로워 보입니다. 마치 계절 속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그렇게 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없을 것이지만 별밤에 나만의 고해성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만큼은 나도 계절 일부가 되게 해달라고…. 아마도 알퐁스 도데의 ‘별밤’이, 어린 왕자의 별이,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이렇게 순수한 사랑의 설렘으로 가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깊어가는 계절 속에 잠시 잊고 살았던 설렘의 소중함이 생각났습니다. ‘설렘’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순수한 에너지, 가슴 벅참, 심장의 박동…. 나이가 들어갈수록 설렐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무심코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힌 이마의 상처’ 들로 인해 방어적이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만큼 메말라가는 감성으로 사랑하는 법을 점점 잊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어렸을 때는 소풍 전날만 해도 설렜던 그 순수함이 점점 늘어가는 나만의 편견과 오만의 색안경으로 덧칠되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제 미사 중 평화의 인사 시간에 맞잡은 내 손이 너무 차다며 오히려 오랫동안 내 손을 잡고 따스한 온기를 주셨던 노 할머니의 손길에서 눈빛에서 작은 감동을 느낍니다. 진료실 밖에서부터 투박한 사투리로 “교수님 줄라고 아침 일찍 뽑아서 가져왔당께!” 하시며 흙이 그대로 묻은 채소 보따리를 대뜸 들이미시는 할아버지의 모습 또한 마음을 훈훈하게 합니다. 보잘것없는 사랑의 표현들이지만 위대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준 우리들의 일상 속 사랑의 설렘이었을 것입니다. 또 한 번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사랑을 빚졌습니다.

 

진정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화려함에 눈을 뺏긴 저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눈을 떠 진정 소중한 것을 보라고 채찍질해준 그 할아버지와 젊은 부부의 추억으로 조금은 희망의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은 더 사랑으로 설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관심으로 거저 주어진 이 소중한 자유시간에 저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보렵니다.

그 몸부림이 때로는 익숙지 않고 때로는 부자연스러워 어색해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거짓 없는 순수한 몸짓으로 사랑하기 위해…. 설레기 위해…. 그리하여 나의 마지막 날 주님을 뵈었을 때 내 삶이 온전치는 않았으나 거룩한 모습으로 살려 노력했었노라고 한없는 어리광을 부려보고 싶습니다.

일과가 끝나고 저물어 가는 늦가을의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오늘 내가 만난 모든 환자 한분 한분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그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한분 한분 모두에게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봅니다. 내 사랑의 주파수가 너무 일방적이어서 상대방이 느낄 수 없을지라도…. 그래서 내가 상처를 받을지라도…. 언젠가 그분들이 내 사랑을 받아들여 사랑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순간 사랑의 공명으로 진동할 때까지…. 세상이 조금이나마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저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얼마간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것임을 다짐해봅니다.

모두 바쁜 생활이겠지만 계절의 섭리 속에 또 소박한 이웃들의 살아가는 모습 속에 잠시나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모두 깃들여 있는 하느님 사랑을 느껴볼 수 있는 하루, 모두 나눌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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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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