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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장 임명 ]시골 본당 사제 꿈꾸던 양 냄새 나는 목자

제8대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의 삶과 신앙 - 기도하는 성가정에서 자란 ‘순둥이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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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의 삶과 신앙 - 기도하는 성가정에서 자란 ‘순둥이 효자’


▲ 김선태 주교가 1997년 6월 스위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로마 순례 중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는 모습.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 김선태 주교가 1997년 6월 스위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로마 순례 중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는 모습. 전주교구 홍보국 제공

▲ 김선태 주교가 연지동본당 주임 시절 신자들과 로마 성지순례 때 성 바오로 대성전의 성 베네딕토 경당에서 미사를 주례하는 모습. 김교동 신부 제공

▲ 김선태 주교(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1989년 동기들과 사제품을 받는 모습.

▲ 1997년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한 강의실에서 교구 사제, 신자들과 함께한 모습.



전북 익산에서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김선태 주교는 형제들이 보기에도 바르고 성실한 아이였다. 쌀가게를 운영했던 아버지(김종화 마르코, 2009년 선종)와 신앙생활에 특히 엄했던 어머니(박정규 세레나, 84) 슬하에서 김 주교는 ‘순둥이’이자 ‘효자’로 불리며 자랐다.

김 주교 가정은 ‘기도하는 성가정’이었다. 시간 맞춰 아침ㆍ저녁 기도를 바치고 성당을 다니는 것은 가족의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그 중심엔 7남매에게 철저한 신앙 교육을 했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자녀가 첫영성체를 앞둔 시기면 매일같이 자녀들을 앉혀놓고 기도문을 따라 외우게 했다. 어머니가 선창하는 기도를 잘 따라오지 못하거나 주일 미사를 빠지는 날에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김 주교는 새벽 미사 복사를 서며 사제 성소를 키웠다. 7남매는 우애가 깊었다. 첫째 형부터 다섯째 김 주교까지 연년생인 5남매는 학업을 서로 챙겼다. 또 막내(김웅태 안드레아, 서울대 교수)까지 위아래 할 것 없이 한데 어울리며 성당을 놀이터 삼아 지냈다.

누나 김선희(베로니카)씨는 “늘 잘 웃고, 어머니 속을 썩인 적 없었던 주교님은 개구쟁이면서도 형제를 챙겼고, 한 번도 서로 다툰 적이 없을 정도로 우애가 좋았다”고 회상했다. 또 “주교님은 복사를 한 번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어쩌다 저녁기도에 빠지면 밥을 아예 주시지 않을 정도로 어머니께서 ‘기도’와 ‘성사 생활’을 철저히 지키도록 가르치셨기에 주교님 또한 성실한 생활이 몸에 뱄다”고 했다.

오로지 사제의 길 따른 모범생

김 주교는 서울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에 입학한 이후 오로지 사제가 되는 길에 매진했다. ‘모범생’인 데다 성실하기까지 했던 김 주교는 소신학교 때부터 책상에서 꼼짝하지 않고 밤새 책을 들여다볼 정도로 학업에 빠졌다. 누가 보면 ‘너무 융통성 없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일과를 규칙적으로 지냈다. 새벽 5시에 성체조배를 하고, 운동한 뒤 책을 읽고 신자들과 만나는 생활은 사제가 된 후에도 줄곧 이어진 김 주교의 삶이었다.

소신학교 동기인 김교동(전주교구 솔내본당 주임) 신부는 “소신학교 때부터 자기관리가 철저했던 주교님 모습은 그 자체로 동료 사제와 신자들에게 모범이 됐다”며 “동기들끼리 매달 만나 좋은 사목 아이디어를 나누면서 공동체 활성화 방안도 고민하곤 했다”고 귀띔했다. 홍성학(가톨릭출판사 사장)ㆍ오성기(전주교구 관리국장)ㆍ최정진(서울 한강본당 주임)ㆍ김종욱(워싱턴한인천주교회 주임) 신부 등이 김 주교의 소신학교 시절 동기다. 김종택 신부(전주교구, 1990년 선종)는 김 주교의 큰 아버지다.

사목에 대한 고민이 뒷받침된 덕분인지 김 주교가 가는 본당마다 공동체가 활성화됐다. 비결은 ‘가정 방문’과 ‘신앙 교육’에 있었다. 마지막 임지였던 삼천동본당을 비롯해 어느 본당을 가든 김 주교는 모든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 1시간씩 기도와 나눔을 하며 신자들과 소통했다. 신학자로서 김 주교는 신자 재교육에 늘 신경 쓰며 본당에 ‘신앙강좌’를 개설해 평일에도 성전 불을 밝혔다.

김 주교는 1997년 전주가톨릭신학원이 설립될 때부터 신학원 과목 개설과 교재 마련 등 기틀을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 제2대와 5대 두 차례 신학원장을 지내던 시절 교재 집필과 번역서 출간에도 열을 올렸던 김 주교는 「사도신경 해설」과 「교리교육 길잡이」 등 10여 권의 신학원 교재를 직접 썼다. 김 주교가 펴낸 번역서는 「물고기 뱃속의 지혜」ㆍ「사랑을 그리는 숨은 꽃, 데레사」ㆍ「예수 수난, 그 여정의 인물들 1-4」ㆍ「죽음 후에는 무엇이 오는가?」 등 십수 권에 이른다.



사회 정의 실현 위한 숨은 조력자

1989년 임수경씨 방북 때부터 문규현(전주교구 원로사목자) 신부와 각별한 선후배 사제로서 지내온 김 주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내는 성명서 대부분을 작성하는 등 사회 정의를 위한 숨은 조력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온화한 미소’와 ‘겸손함’으로 지내온 김 주교의 원래 바람은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을 위해 사는 것, 그리고 시골의 작은 본당에서 청년, 어르신과 소박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바람과는 달리 큰 직무를 맡게 된 김 주교는 14일 임명발표 소감에서 “주님께서는 저를 구원의 영광으로 이끄시고자 부르셨고, 그에 앞서 먼저 십자가를 지게 됐다”며 “부족하기에 더 많은 기도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어머니 박정규 여사는 20년 전 김 주교가 스위스에서 유학할 당시, 한복을 차려입고 아들과 함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했던 일을 “마치 하늘나라에 다녀온 기분이었다”며 말했다. 매달 찾아와 안부를 나누고 함께 식사하는 김 주교를 여전히 ‘효자’라고 부르는 어머니는 “아들의 주교 임명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기쁨이 ‘10’이라면 걱정이 ‘90’”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무거운 책무를 맞게 된 주교님을 위해 교구민이 함께 기도하며 사목을 돕는 영광스러운 모습이 이어지면 좋겠다”고 기도를 청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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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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