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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11) 김두만 그레고리오 (전 공군참모총장)

하늘을 지배한 사나이, 하느님께 순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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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지배한 사나이, 하느님께 순명하다


▲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이 공군을 상징하는 빨간 마후라를 두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이힘 기자 lensman@cpbc.co.kr

▲ 1952년 100회 출격 당시 동료들이 목마를 태워주며 축하하는 모습.

▲ 김두만 전 총장이 2015년 6월 국산 전투기 조종 후 후배들이 1952년의 모습을 재현한 모습. 김두만 전 총장 제공



대한민국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6ㆍ25 한국전쟁의 영웅인 올해 91세의 김두만(그레고리오) 전 공군참모총장.

6ㆍ25 전쟁 당시 맨손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공군 사상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세운 불사조 조종사의 표상이다.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매일 죽음에 대한 공포와 싸워야 했지만, 노병은 오랜 기간 무신론자였다. 조국을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그에게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부활을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비행기를 보면 마음이 설렌다는 노병, 아내와 함께 뒤늦게 세례를 받았고 매일 대화를 나눈다.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흔들리는 안보관이 두렵다며 국가 안보에 대한 통합된 국민 의식을 강조했다. 조국이 부여한 임무를 올곧게 수행한 노병의 삶은 바로 하느님이 주신 십자가의 소명(召命)이 아니었을까?

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



▶올해 연세가 91세신데, 2015년 국산 전투기를 타셨어요.

전역한 지 44년 만에 국산 초음속 전투기를 탔는데요, 아주 좋았어요. 조국의 발전상에 감개무량했습니다. 남의 나라 비행기만 탔는데 ‘야 이렇게 좋은 비행기를 우리도 만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매우 흡족했어요. 조종간을 잡아보니 별로 낯설지도 않고 옛날에 비행기 탈 때 생각이 그대로 납디다. 전투기를 타고 6ㆍ25 때 전투했던 지역을 살펴봤는데, 조종사는 죽을 때까지 비행기 생각을 못 버리죠.



▶한국 공군사상 최초로 6ㆍ25 전쟁 100회 출격 기록을 갖고 계시는데요. 출격할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이상하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본 적이 별로 없어요. 6ㆍ25 출격 때도 그렇고 비행기 탈 때도 그랬어요. 항상 비행기를 타는 게 매우 행복했어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요. 출격할 때가 제일 침착할 때이고 조종석에 앉으면 그때부터 무념무상(無念無想)입니다. 오로지 임무만을 생각했어요. 두렵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100회 출격이 1952년 1월인데 원산에 가서 철도 시설을 폭격하고 금강산 부근 북한군 보급기지가 있는 창도리를 공격하는 것이었어요.



▶처음 비행의 꿈을 가진 게 언제였나요.

내가 일본에 간 것은 세 살 때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삼촌이 형제들을 일본에 데리고 갔는데 삼촌은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일본은 의무교육이어서 학교에 들어가게 됐어요. 열 살 때 학교 마당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처음 봤는데 안경 쓴 조종사를 보고 저게 사람인지 도깨비인지 깜짝 놀랐죠. 그때 처음 비행기에 호기심을 갖게 됐고 졸업 후 어느 날 소년 비행병 모집 포스터를 보고 응모해 일본 육군 항공에 들어갔어요. 우리나라 공군 초창기 구성원들 가운데 일본 육군 소년비행학교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일본 육군 소년비행단 하면 흔히 알려진 가미카제 특공대인데 이를 아셨는지요.

열일곱 살 때인 1943년 9월 비행학교에 들어가 1944년 3월부터 비행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한 50시간 초동 비행을 마치고 고등 비행 훈련을 하기 위해 동남아로 파견됐는데 처음부터 가미카제라고 얘기는 안 했어요. 입교하니까 조교들이 “야, 소모품들 왔다” 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얘기인지 그때는 몰랐고 나중에 알았어요. 종전 직전인 7월 말쯤 싱가포르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갔더니 동남아 각지에 있던 훈련병들이 다 모였어요. 그때 특공대에 편입됐다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때부터 천황이 하사하는 것이라면서 술과 담배를 주더라고요. 그래서 가미카제로 갈 뻔했는데 바로 종전을 맞았고 이후 귀국을 한 거죠.



▶해방 후 고국으로 오셔서 가족들은 만나셨나요.

세 살 때 일본으로 떠나서 스무 살에 돌아왔으니까 1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죠. 내가 아는 것은 경남 의령 고향 주소뿐이었어요. 고향을 찾아갔더니 먼 친척분이 계셨는데 그분에게 해방 후 작은 누님이 한국으로 돌아와 합천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곳에서 누님을 만나 좀 있었는데 마음속엔 오직 공군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당시 일본 육군 대위 계급으로 우리를 인솔해서 고국으로 돌아온 김정렬 장군을 만나러 서울에 갔죠. 우리나라 공군이 생기면 오직 비행기를 타겠다는 일념뿐이었어요.



▶6ㆍ25 전쟁 당시 비행기에서 맨손으로 폭탄을 투하하셨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가능한가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6ㆍ25 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비행기는 연락기 12대와 ‘건국호((T-6)’라는 훈련기 10대가 전부였어요. 모두 비전투기죠. 전쟁이 났는데 뭘 가지고 싸웁니까. 당시 북한은 200대 가까운 소련제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죠. 조종사가 앞에 타고 뒤에 탄 정비사나 조종사가 고도 500피트 적지 상공에서 적군이 오면 문을 열고 15kg 폭탄을 손으로 때리는 것이죠.



▶최근 제주도에 공적 기념비를 제막한 딘 헤스 중령과는 6ㆍ25 때 함께 전투하셨죠.

동료들과 함께 일본에 가서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전투기가 된 F-51 무스탕 전투기를 갖고 대구로 돌아왔는데 당시 F-51은 속도가 빠르고 무겁고 까다로운 비행기였어요. 한두 번 타고 전투를 한다는 건 굉장한 무리였죠. 그래도 달리 방도가 없어 무리하게 출격했는데 이후 딘 헤스 소령을 비롯한 미국의 고문단이 와서 한국 공군을 훈련했습니다. 나의 비행 스승이고 전투 스승이었죠. 딘 헤스 소령은 신학교를 나온 목사였는데 전쟁이 나니까 조종사가 돼서 한국에 왔어요. 인자하고 조용한 분이었는데 좋은 일도 많이 했어요. 전쟁고아들도 구했고요.



▶1964년에 나온 영화 ‘빨간 마후라’의 배경이 된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에도 참가하셨죠.

편대를 끌고 출격을 했는데 첫 출격 때는 실패했어요. 폭탄이 철교에 맞았는데도 철교가 끊어지지 않더라고요. 난 6ㆍ25 당시 출격할 때에는 빨간 마후라는 하지 않았어요. 흰색의 낙하산 폐품을 잘라서 그걸 매고 조종복을 입었죠. 김정렬 장군의 동생인 김영환 장군이 평소 빨간색을 좋아해 처음 착용을 했고 이후 영화 빨간 마후라가 인기를 얻어서 한국 공군의 상징이 됐습니다.



▶공군참모총장까지 오르셨는데 1971년 세인을 놀라게 한 ‘실미도 사건’으로 갑자기 전역하셨어요.

1968년 1월 김신조 등 124군 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 과잉 충성으로 684부대 일명 실미도 부대가 만들어졌는데 왜 공군에 소속됐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여하튼 공군에서 맡아 3년이 지났는데 6개월 내 북파 임무도 주어지지 않고 예산도 줄고 대우도 나빠지니까 내부가 엉망진창이 돼서 곪아 터진 겁니다. 그래서 국방장관과 상의를 했지만, 요원들의 신분이 민간인이어서 원대 복귀를 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요원 중에는 일부 범죄자 출신도 있었지만, 사형수나 무기수는 아니었어요. 임무에 성공하면 장교를 시켜주기로 했는데 그걸 안 해 주니까 탈출을 해서 청와대로 향하던 중 자폭한 것이죠. 그래서 결국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공군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비행기를 못 타는 것이 가장 아쉽더라고요.



▶전쟁 중에 결혼하신 아내분과 한날한시에 세례를 받으셨어요.

집사람이 몸이 좋지 않아 심장병을 앓다가 2년 전에 하늘나라로 갔는데 천주교 신자인 큰아들의 권유로 뒤늦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받기 전에 아내는 개신교로 교회도 다니고 절에도 다녔어요. 저는 무신론자였고요. 6ㆍ25 때도 종교가 없었어요. 아내를 따라서 성당에 갔는데 뭐랄까 좀 깨끗한 것 같아요. 아주 좋더라고요. 아직도 천주교 신자로서 완전체는 못 되지만 미사 드릴 때는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차분해집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내를 위해 주로 어떤 기도를 바치세요.

그냥 물어보는 것이죠. “하늘에 잘 있지?” 하고요. 잘 있다고 해요. 하늘에서 저를 잘 보고 있겠죠. 어차피 내가 죽은 다음에 같이 합쳐지게 되니까요. 다른 종교들은 그냥 건성으로 했는데 천주교는 처음엔 좀 까다롭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교리 공부 등 과정을 겪다 보니까 진지하게 임하게 되더라고요. 군인으로서 역시 종교가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가라앉히고 무언가 종교의 힘이 있을 것 같아요.



▶대한민국 공군의 전설로서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요즘 흙수저, 금수저 그런 얘기가 있는데 나는 흙수저도 안 되죠.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랐으니까요. 혼자 좋아하던 비행기를 발견해서 타게 된 것이 매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내가 비행기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뭘 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는데 요즘 젊은이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거기에 몰두할 수 있는 그런 젊은이들이 됐으면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에요.



▶요즘 안보 불감증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노병으로서 국가 안보의 중요성에 대해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제일 걱정이 국가 안보예요. 나는 식민지 생활을 했고 나라 없는 설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애써 가꾼 이 나라를 앞으로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동북아 열강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국민이 단합해야 합니다. 국가를 지키는 일은 우파고 좌파고 없습니다. 하나로 통합돼야죠. 이스라엘은 국방 문제에 국민이 완전히 단합돼 있잖아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강국 속에서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킬 수 있도록 국민 전체가 생각해야 합니다.



▶대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사회 지도층에 어떤 바람을 갖고 계시나요.

한 나라가 발전하고 후퇴하는 것은 결국 지도층에 달려 있어요. 지도층은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솔선해서 찾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국민들이 존경하는 지도층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아쉬워요. 나는 흙수저도 안 되는 신세에서 공군참모총장까지 하면서 항상 국가에 감사하고 있는데요. 대한민국이 있고 공군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죠. 나는 공군에 내 인생을 바쳤고 보람도 느낍니다. 마음의 고향이죠. 마지막 계획은 ‘공군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떠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비를 아껴서 적금을 들고 있는데 돈이 좀 모이면 순직 조종사 자녀를 지원하는 하늘사랑 장학재단에 기부하려고 합니다. 공군사관학교에도 후원하려 하고요.



방송 시각

TV : 25일 오후 7시, 26일 오후 11시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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