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자립 정신 심고 고난 속 공동체 격려
▲ 대신학생 시절 양기섭(왼쪽), 홍용호(가운데) 신학생과 함께한 강영걸 신학생. |
▲ 메리놀외방선교회원들과 피정을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는 강영걸(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신부. |
그러나 강 신부의 유년 시절이나 성장기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훗날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되는 노기남 대주교나 서울대목구 윤형중 신부, 평양지목구 첫 사제 양기섭 신부와
대신학교 동창이었다는 단편적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다녔고, 졸업 뒤 1931년 5월 30일 서울대목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뮈텔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본래는 서울대목구 소속이었지만, 1927년 평양지목구가 설정돼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안남ㆍ북도 선교지를 맡게 되면서 평양지목구 사제로 사제품을
받았다.
강 신부는 성품이 무척 강인했던 사제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와 주교의
명이라면 절대적으로 순명했고,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끝까지 완수해냈으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잘 유지했던 사제이기도 했다. 후배인 홍용호 신부가 평양대목구장 서리
직무대행에 이어 주교로 임명되자 강 신부의 동창인 양기섭 신부는 서울대목구로
소속을 옮겼지만, 강 신부는 끝까지 홍 주교에게 순명하면서 남모르게 홍 주교를
지원하고 협력했다.
수품 뒤 서포지목구청에 주재하던 강 신부는 메리놀회가 일본 교토지목구 포교지를
맡게 되면서 메리놀회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5년간 선교사들을 돕는다.
교무금 곡식으로 내도록 해 자립심 강화
이어 1937년 7월 귀국, 중화본당 주임으로 첫 발령을 받는다. 사제로서 ‘첫 본당
사목구 주임’이라는 자리가 주는 각별한 느낌만큼이나 중화본당에 그는 사랑을 쏟았다.
더욱이 의사소통이 어려운 메리놀회 사제가 아니라 한국인 사제였기에
본당 공동체
분위기 또한 활기를 띠었다. 강 신부는 우선 농촌 본당이라는 점을 참작해 교무금을
봄, 가을로 거둔 곡식으로 내도록 함으로써 교회에 자립 정신을 심었다. 부임 1년
만인 1936년 8월 가난한 아동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성심학원을 개원했으며, 다음
달 유치원을 개원(건물은 이듬해 신축)하는 등 문맹 퇴치에 앞장섰고, 청년회 활동에도
역점을 둬 80여 명의 회원을 중심으로 전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울러 1937년
김리신 회장이 대지와 건축 자재를 희사하자 평남 중화군 신흥면 삼응리(현 평양시
강남군 고천리) 공소에 99㎡(30여 평) 규모 의 강당을 신축했다.
1939년 1월 재일교포 사목을 위해 다시 일본에 건너간 강 신부는 1942년 귀국,
이듬해 4월까지 의주본당 주임을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총동원령으로
착취가 가혹했지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을 잘 무마해 의주본당을 보호했다. 일제의
무기헌납 요구로 모든 교회가 수난을 겪을 때도 의주본당만은 강 신부의 노력과 높게
지은 종각 덕분에 1919년 성당 신축 당시 정 마리아가 헌납했던 종을 지켜낼 수 있었다.
1943년 6월에는 일본인들이 개간한 농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민들이 대부분인 운향시본당에 부임, 11개월간 사목하며 농민들이 용기와 인내심을 갖도록 돌보며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했다. 이어 1944년 4월부터 8개월간 정주본당에서 사목한 뒤 그해 11월 마산본당에 전임됐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고 일제의 학정과 침탈, 생필품 부족이 만연한 상태여서 교회 운영 또한 큰 지장을 받았으나 강 신부는 본당 공동체가 내적으로 충실하도록 힘을 쏟았다.
공산당의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지도
8ㆍ15 해방 후는 기쁨과 함께 공산당의 박해가 찾아온 수난의 시기였다. 교구
사제가 부족했기에 마산본당에 강서본당 주임까지 겸직한 강 신부는 신자들이 무신론자들의
감언이설에 흔들리지 않도록 신자들의 지도에 애를 써야 했다.
1949년 5월 북한의 모든 성직자가 수난기에 들어가면서 강 신부에게도 어려움이
미쳤다. 마산본당이 자리 잡고 있던 강서군 성태면(현 평남 증산군) 인민위원회에서
성모학원 건물을 양도하라고 요구했으나 강 신부가 이를 거절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성당을 드나들며 괴롭히고 감시했다. 사제와 신자들의 접촉도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도 위협을 받았다.
1950년 6월 24일 아침, 마산본당 밭에서 일하던 강 신부는 성태면 인민위원회로
연행됐다가 강서군 인민위원회를 거쳐 평양 인민교화소에 투옥됐으며, 1950년 9월
23일께 유엔군의 북진으로 다급해진 공산군에 의해 같은 감방에 갇혀 있던 8명과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다. 당시 강 신부의 나이는 47세였다.
강 신부의 순교 사실은 1ㆍ4 후퇴 때 월남한 현용국(비오) 마산본당 회장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전쟁 당시 강 신부와 같은 감방에 갇혀 있다가 총살형을 받았지만,
유엔군에 발견돼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인물이 거제포로수용소에 포로로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현 회장이 직접 찾아가 들은 내용을 20여 년이 지나 1979년 5월 7일에
채록한 것이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강영걸 신부는
△1904년 평남 평원군 노지면 추흥리 출생
△1931년 5월 30일 사제 수품
△1950년 6월 24일 마산본당 인근 밭에서 일하다가 성태면 인민위원회로 연행
△1950년 9월 23일께 평양인민교화소 수감 중 총살형
△소임 : 서포 평양지목구청 주재, 메리놀회 일본 선교 지원, 중화본당 주임, 일본 교포사목, 의주ㆍ정주ㆍ마산(강서 주임 겸임) 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