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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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순교자들]⑤ 김필현 신부

한국 교회 첫 로마 유학생, 관서 교회의 기둥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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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첫 로마 유학생, 관서 교회의 기둥 되다

김필현(루도비코)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로마 유학생’이다. 같은 평양교구의 박용옥 신부와 함께 선교지 사제 양성의 요람인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에 유학했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훌륭한 사제로 양성돼 평양교구로 돌아와 관서 교회의 초석이자 기둥이 됐다. 1949년 5월 14일 제6대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가 끌려간 상황에서도 부감목(지금의 총대리)으로 교회를 굳건하게 지켰지만, 홍 주교가 끌려간 지 한 달 만에 평양시 인민위원회의 소환을 받고 출두했다가 체포돼 행방불명됐다.

▲ 1950년 10ㆍ20 평양수복 당시 평양대목구청에서 조지 캐롤 몬시뇰이 어렵게 회수한 사진이다. 1949년 신축 공사 중이던 관후리성당에서 당시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왼쪽)와 부감목(현재의 총대리) 김필현 신부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총명하고 신심 두터웠던 모범생 

김필현 신부는 1909년생이다. 출생지는 평안남도 평양시 경제리(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경상동) 279번지. 지금의 그 유명한 평양냉면 집 옥류관이 있는 윗동네다. 관후리본당의 후원자이자 신앙심 깊고 헌신적인 봉사자였던 아버지 김성호(도미니코)씨와 어머니 기 데레사씨 사이 6남매 중 차남이었다. 여동생 중 한 명은 원산의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 수도자가 된 김 아기 예수의 데레사 수녀다.

소년기의 김필현은 공립 종로보통학교(현 초등학교)를 월반, 15세에 졸업했을 정도로 총명했다. 언제나 학교와 성당만 아는 성실하고 신심이 두터운 모범생이었다. 보통학교 시절엔 본당 남학생들을 모아 성체조배반을 조직해 매일 오후가 되면 1시간씩 성체조배를 했고, 본당 신부였던 패트릭 클리어리 신부와 본당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김필현은 평양고등보통학교(평양고보, 훗날 평양제2중)에 들어간다. 당시 경성고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경성제국대학 입학생을 내던 명문학교였다. 그러나 평양고보 2학년을 마친 김필현은 같은 교구의 박용옥과 함께 서울로 유학, 용산의 예수성심 소신학교를 거쳐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했으며, 곧바로 예수성심 대신학교에 진학, 철학 과정 3년을 이수했다.

철학 과정을 마친 김필현 신학생은 당시 평양지목구장 존 에드워드 모리스 몬시뇰의 특별한 배려와 주선으로 박용옥 신학생과 함께 로마 우르바노대학에서 유학하게 됐다. 1933년 9월 6일 고국인 미국으로 귀국하던 휴고 크레이그 신부와 함께 배편으로 유학길에 올라 홍콩을 거쳐 53일 만인 그해 10월 29일 로마에 도착했다. 당시 유학생활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유학길에 오른 김필현 신학생의 각오와 감상이 당시 평양지목구에서 발행하던 월간 「가톨릭 연구」에 서술돼 있을 뿐이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신학생과 어울려 김필현, 박용옥 두 신학생은 다른 학생들에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공부했고, 1934년에는 크레이그 신부와 함께 교황 비오 9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1939년 3월 18일 로마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박용옥 신학생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유학을 떠난 지 6년 만이었다.

그해 10월 24일 귀국한 김 신부의 첫 미사는 닷새 뒤인 29일 평양 관후리성당에서 봉헌됐다. 미사 직후 환영식이 베풀어졌는데, 여러 신심 단체의 축사와 예물 증정, 조셉 코노스 신부의 축사, 김 신부의 답사가 이어져 자못 흥겨운 잔치가 벌어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 대동강 동쪽의 평양시 외곽지대를 관할한 대신리본당 보좌로 사목의 첫발을 내디딘 김 신부는 특히 주일학교 학생들을 사랑했고 또 잘 가르쳐 어린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3년 만인 1942년 2월 대신리본당 주임에 임명됐고, 1943년 3월 홍용호 신부가 평양대목구장에 착좌하면서 부감목이 돼 대신리본당 주임을 겸직했다. 1944년 4월 24일에는 주교좌인 관후리본당 주임으로 임명됐고, 부감목 직무도 함께 맡아 사목했다.

당시 김 신부는 기도하는 사제, 책임감 있는 사제로 소문났다. 때로 냉철하고 엄격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호탕하고 적극적인 성격도 보여줬다. 다만 교리 지도만큼은 철저해 판공성사 때면 엄격한 찰고(교리시험)에 어른들도 ‘울고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교구 사제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맺었으며 그들의 조정자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다. 손재주가 많아 혼자 사는 전교회장 집 전기 시설에 문제가 생기면 손수 고쳐주기도 했고, 신자들의 어려움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왔다. 관후리성당이 일본군에 징발돼 헐리면서 주일학교 교리실이 부족하게 되자 자신의 사제관을 교리실로 빌려주기도 했는데, 어린이들이 그의 방에 들어가 마구 뛰어다니며 어지럽혀도 나무라지 않았다. 김 신부는 특히 신학생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수도 성소 계발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그가 이끌어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 입회한 수도자가 45명이나 됐다.


▲ 1946년 3월 평양시 인민위원회에서 반환 받아 신축 중이던 관후리 성당 대성전. 오른쪽 구석에 김필현 신부가 서 있다.

 

김 신부의 감동적 강론 듣고 봉헌 아끼지 않아

해방 이후 김 신부는 홍 주교의 위임을 받아 일본군에 징발됐던 관후리 주교좌성당 부지 되찾기에 나섰다. 주교 비서 겸 교구 재정 담당이던 강창희(야고보)와 함께 한 달이 넘는 협상 끝에 1946년 3월 29일 성당 대지를 반환받았고, 4월 1일에 소유권 이전 등기를 완료했다. 그 와중에 강창희가 순교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성당 반환이 순조롭게 진행돼 관후리대성당을 새로 짓기 위한 ‘평양교구 사업 기성회’가 조직돼 총책임자로 임명되자 김 신부는 상임이사로 임명된 강유선(요셉)과 함께 평안남북도 본당과 공소를 돌며 모금 활동에 몰두했다. 당시 자전거를 타고 모금에 나선 김 신부가 ‘대성전은 우리 손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민족 자립과 하느님 사랑을 고취하는 강론을 하면 이에 감동을 받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봉헌했다. 또, 당시 평양대목구 신자들은 저마다 식량을 지고 평양에 와서 대성전 신축 공사 현장에서 2주일씩 노동을 하며 봉사했다. 그 덕에 1947년 9월 1일 관후리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이듬해에는 성당 외형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게 됐다.

그러나 1948년 12월 28일 평양시 인민위원회에서 건축 중인 대성당을 1949년 1월 3일까지 양도하라는 공문을 보내오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가 본격화됐다. 평양시 인민위원회(위원장 한명수)와 설전이 오갔고, 김 신부도 세 차례나 소환돼 언쟁하기까지 했다. 1949년 6월 결국 김 신부는 관후리주교좌성당 양도 문제로 교구 경리 담당 최항준 신부, 기성회 담당 강유선과 함께 평양시 인민위원회에 출두했다가 체포됐고, 보위부로 이송돼 그 후 행방불명됐다. 김 신부 일행이 시 인민위원회에 소환된다는 소식에 어린 학생들까지 포함된 신자 60여 명이 뒤따랐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들은 보위부원들의 엄한 감시 속에 검은색 차량에 태워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 정황상 이들은 홍 주교나 다른 사제들과 같이 평양 인민 교화소 특별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다가 10ㆍ20 평양수복 직전에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자료 제공=평양교구 사무국


김필현 신부는
△1909년 3월 8일 평안남도 평양시 경제리 279번지 태생

△1923년 공립 종로보통학교 졸업, 평양고보 2학년 재학 중 예수성심 소신학교로 전학

△1930년 동성상업학교 졸업

△1933년 9월 예수성심 대신학교 3학년 수료 뒤 로마 유학

△1939년 3월 18일 로마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사제 수품, 그해 10월 24일 귀국

△소임 : 대신리본당 보좌ㆍ주임, 평양대목구 부감목(관후리주교좌본당 주임 겸임)

△1949년 6월 10일 평양시 인민위원회(위원장 한명수)에 연행 체포돼 행방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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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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